책 소개
추천의 글 | 리처드 도킨스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종교에 현혹된 것을 제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 그들은 완전한 우주가 농업 혁명 후에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뱀이(아마 유창한 히브리어로) 진흙으로 만들어진 한 남자와 그에게서 갈비뼈를 잘라 생겨난 한 여자를 속여 죄에 빠지게 했다고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꿈의 시대(세계 창조 때의 지복 시대)로부터 수없이 양자택일의 신화를 날조하고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기원 신화가 자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광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나의 실수는 모두가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 조용하고 합리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그 명백함을 펼쳐 보인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착각을 제거할 수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며, 장악당한 마음 안에 들어가서 공감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명백한 난센스(존재의 모든 기질로 잘못된 신화를 믿는 것)를 정직하고 진지하게 믿을 수 있는 지경까지 세뇌당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떤 것일까? 헬렌 켈러가 눈이 멀고 귀가 먹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내면으로부터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근본주의자의 세뇌의 끈을 끊고 이것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한 지성으로 말해주는 이들이 더러 있다. 이러한 회고록 중의 어떤 것은 많은 것을 약속하지만 결국 독자들을 실망에 이르게 한다. 에드 후세인의 『이슬람교The Islamism』는 예의 바른 젊은이가 급진적 이슬람교의 정신적 뱀 구덩이로 한 걸음 한 걸음 빨려 들어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인은 독선적인 난센스 속에서 정열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내면에서 정말 어떤 것인가에 대한 느낌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그가 지하디즘(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에서 빠져나온 것도 단지 정치적 극단주의를 포기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여전히 이슬람교에 대한 어린 시절의 신앙을 뿌리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신앙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취약한 채로 남아있는 저자를 염려한다. 아이얀 히르시 알리의 『이단자Infidel』는 이슬람교 아래에서(“아래에서”란 말은 바른 표현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할례의 야만성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이 겪는 이상한 압제에서 탈출하는, 대단히 흥미롭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그러나 가장 독실한 신앙을 가졌을 때조차 그녀는 개종을 위해 설교하거나 희생자를 적극적으로 찾는 광신자의 부류는 아니었다. 그녀의 책 역시, 독자로 하여금 종교적 망상에 의한 정신 상태를 이해하는 데 썩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한, 내부적 망상에 대한 가장 유창한 증인은 댄 바커다. 그는 어릿광대 같은 미국 청교도 근본주의의 초현실적 세계에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망명한 사람이다. 바커는 유쾌한 ‘파트너’(이 단어가 뜻하는 모든 의미가 담겨 있는) 애니 로리 게일러와 함께 미국 정교 분리주의에서 가장 재능있고 영향력 있는 대변인 중 한 사람이다. 완곡하게 말하면, 댄이 평생을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진정으로 놀라운 이야깃거리가 있다. 그의 개인사에 관한 것과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불모지에서 탈옥한 이야기다. 댄은 출발부터 바로 그 안에 있었으며, 옴짝달싹 못했다. 그는 평범한 설교자가 아니라 “사람들이 버스에서 나란히 앉기를 원치 않을” 설교자였다. 그는 거리에서 생면부지의 사람을 따라가면서 구원을 받았는지 물어보는 그런 설교자였다. 당신이 개를 풀어 공격하게 할지도 모를 무단 침입자 같은 사람이었다. 댄은 꼴통이 어떤 것인지, 광신자라든가 아주 열렬한 미치광이, 노래하고 방언하는 모든 종교적인 박쥐가 어떤 것인가를 깊이 안다. 그는 박쥐 종탑의 세계 속으로 - 우리를 동시에 웃게 하거나 소름끼치게 하면서 - 인도할 수 있으며, 우리가 공감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또한 그는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만의 생각이 주는 낯선 즐거움에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안다. 사회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습인 ‘사고思考’는, 그의 전 생애가 여태까지 시간을 낭비하는 망상이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깨닫도록 이끌었다. 혼자서 그는 제정신을 되찾았다(어느 정도까지는). 그는 우리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고통스럽게 밝히다가도, 기분을 돋우며 이야기할 때는 특출한 말재주와 지성과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일찍부터 부모의 근본주의 교파 안에서 세뇌를 당했으며, 말씀의 진실 안에서 일점일획 의심치 않는 신앙을 가졌고, 영혼들을 불안하게 하며 “구원”하는 손쉬운 재주가 있었으며, 예수를 위한 설교자·음악가·작곡가로서의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는 그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지적이지만 순진한 어린 마음 안에서 의심들이 자리 잡고 점차 증가하는 과정이다. 이미 확신에 찬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목사로 몸담고 있던 교회를 완전히 떠날 수 없었던 공백기를 이야기할 때는 비애감이 감돈다 -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삶이 그가 알았던 유일한 삶이었으며, 바깥세상과 직면하는 것이나 가족을 진실과 맞닥뜨리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비애가 있는 곳에 코미디는 멀리 숨어 있지 않다. 그가 마침내 자신의 무신론을 알렸을 때 종단 친구들의 응답에는 음침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가 받은 많은 편지 중에는 무신론적 신념이 실제로 왜 잘못된 것인지 그 이유를 밝히는 편지는 없었다. 아마도 가장 재미있는 예는 밀턴 바푸트 목사의 편지일 것이다. 그는 댄의 동생에게 명백한 방해의 의도로 말했다. “그렇다면 댄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나요?” 아니오, 목사님. 댄은 더 이상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러한 사실도 무신론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랍니다. 무신론자가 되어 목사직에 사표를 내기까지의 과정에서 댄이 지체했다는 사실은, 댄과 같은 코스를 갔지만 마지막 벽에 부딪혀 뒷걸음질치는 성직자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목사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아는 생계유지의 유일한 방법을 과감히 뛰어넘지 못하며, 자신이 활동하는 제한된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티켓 - 아주 작은 연못 속에 있는 그들의 커다란 물고기 두건 - 을 감히 포기하지 못한다.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전 책 『신앙 안에서 신앙을 잃음Losing Faith in Faith』을 출판하고 나서 댄 바커 자신은 매혹적이게도, 오늘날 신앙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겁을 내는 수많은 성직자를 위해 일종의 비밀스런 집회 푯말이 되었다. 일종의 고해신부처럼, 댄은 환멸을 느낀 성직자를 위한 자석이 되었다. 고해신부이자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그는 그들의 신뢰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댄 바커 자신의 고해신부는 이 책의 독자다. 그리고 독자 입장에서 떠들썩한 축하를 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댄이 속박을 깨부술 때, 그리고 더욱이 그를 처음으로 종교적 열렬함으로 이끌었던 부모와 두 명의 형제 중 한 명이 불신앙에 동참하게 되었을 때,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역으로 자신의 설교 기술을 가족에게 적용하여, 그들을 불신앙으로 변화시키는 데 전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 누구에게도, 무신론자가 되는 것도 하나의 선택권이란 말조차 하지 않았다. 가족은 댄의 사례를 경험하자마자,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도 비신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이 진정한 쟁점에 관해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지 않아 그들을 명백한 결론에 이르게 했다. 그의 어머니가 “종교는 허튼소리 투성이다”라고 결론짓는 데는 단 몇 주가 걸렸을 뿐이다. 조금 더 지나서 그녀는 행복하게 다음 말을 추가할 수 있었다. “이젠 종교를 미워할 필요가 없다.” 댄의 아버지와 두 명의 형제 중 한 사람도 유사한 과정을 밟았다. 다른 한 형제는 거듭 태어난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도 어느 날엔가 광명을 볼 것이다. 종교를 버린 이야기는 단지 이 책의 처음 몇 장을 차지한다. 종교적으로 중독된 댄의 청춘이 더욱 충만된 성숙에 무대를 양보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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