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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책머리에 평전쓰기, ‘위대한 어둠’ 속의 질문을 찾아서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 이것은 말이다. 그러나 루쉰 문학을 설명하는 점에서 이것은 말 이상의 것이다. 말이라고 한다면 상징적인 말이지만, 차라리 태도, 행위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사람이 ‘절망’과 ‘희망’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러한 자각을 얻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서광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다케우치 요시미의 이 결론에, 나로선 굴복하지 않을 길이 없다. 기록된 문장들이야 어찌어찌하여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다지만, 그런 문장을 쓴 사람을 설명할 길은 아무래도 요원하다. 원래 인간의 삶이란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불가해한 공백과 균열을 내포하기 마련인 법. 텍스트를 뚫고 들어갈 길이 없을 때, 종종 저자의 삶으로부터 압박해 들어가 보려는 꼼수를 써 보지만, 텍스트가 투명하게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루쉰만 해도 그렇다. 그의 삶을 통해 텍스트의 빈틈을 더듬을 수도, 거꾸로 삶의 불가해함을 텍스트의 한 구절로 움켜쥘 수도 있을 듯하지만, 여전히 루쉰이라는 인간을, 그의 문장에 얼핏 내비칠 뿐인 그의 삶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땐 도리가 없다. 그 문장을 몸소 살아 보는 수밖에는. 훌륭한 생애를 기술하는 일이란 훌륭한 생애를 사는 일만큼이나 어렵다고 했던가. 누군가가 아무리 훌륭한 생애를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남겨진 건 글, 말, 업적, 만난 사람들 같은 흔적일 뿐이다. 그 흔적들로 한 인간의 생애를 기술한다는 건 얼마간은 소설적일 수밖에 없는 것. 하여 버지니아 울프는, “좌우를 살피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진리의 발자국을 따라, 꽃의 유혹도 뿌리치고, 어두운 곳도 마다 않으며, 한걸음 한걸음 방법적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기술되는 전기를 조롱하며, ‘아마’와 ‘듯하다’가 난무하는 올란도의 전기를 쓴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그의 삶에 가닿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마음에 쿵, 하고 내려와 꽂히는 문장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를 만나고 싶다. 그 인생 속으로 입류(入流)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갈망이야말로 독자 자신의 심혼을 더듬고 자신의 생각을 다듬으려는 욕망의 발로가 아닐까. 예컨대,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평전쓰기란 정처(定處)를 상실한 자가 다른 곳을 사유하는 방법이었다. 몽테뉴,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니체, 클라이스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발자크……. 그는 끊임없이 타인의 생을 편력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의 삶에 자신의 질문을 포개 놓았다. 때문에 츠바이크의 전기를 읽을 때면 어김없이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인생 어디쯤에 표시해 둔 츠바이크의 흔적들을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시간과 지금의 시간 사이를, 그들의 언어와 나의 언어 사이를 오가며 부단히 질문을 길어 내는 글쓰기, 그것이 평전이다. ‘평전’이라는 말의 ‘평’(評)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그 사이를 오가는 편력(遍歷), 그 편력을 통한 배움과 자기성찰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정의와 미소』에 등장하는 열일곱 청년은 배우 추천서를 받고자 위대한 극작가를 찾아간다. 당대 최고의 극작가가 이 조무래기를 친절하게 받아줄 리 만무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배우가 되고 싶노라고, 어떤 극단을 가는 게 좋을지 모르겠으니 알려 달라고 조언을 구하는 청년. 비서 편에 극단 이름이 적힌 종이쪼가리를 받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이 또한 막막한지라 대체 어떻게 하이면 이 극단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 청년에게 극작가의 일갈(一喝), “혼자서 해!” 그런가 하면, 이제 막 문단 생활을 시작하는 초심자로서 한마디 조언을 구하고자 했던 폴 발레리에게 말라르메가 남긴 불친절한 조언,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들어라.” 요컨대, 위대한 스승들은 물음을 더 큰 물음으로 돌려 주신단 말씀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스승들은, 소세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위대한 어둠’이다. 공부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스승들을 만나, 그 ‘위대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해봤고, 뜻하지 않은 대답을 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문득, 내가 어쩌다, 이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런 사람들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한동안 먹먹해지곤 한다. 그 인연이 하도 놀랍고 고마워서다. 불교에서는 흔히 깨달음을 얻는 데 삼아승지겁(三阿僧祗劫)이 걸린다고 말한다. 일설에 따르면 1겁이 10의 52승년이라니까,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은 어림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이를 그저, 아주 오~래 걸린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내 멋대로의 해석을 허한다면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다. 깨달음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연기(緣起)의 자기표현이라고. 내가 여기 있기까지, 내가 여기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기까지는 무수한 겹의 인연들이 있었을 터. 공부란 바로 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을 만나는 과정이 아닐까, 그 인연들이 나를 빌려 이런 글들로 표현되고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이런 인연 덕분에 적어도 백 년, 많게는 몇 천 년, 우리는 생명연장(!)의 꿈을 실현 중인 것이다. 이 책은 지난 해 『서울신문』에 연재한 원고들을 모은 것으로, 앞서 나온 『고전 톡톡 : 고전, 톡하면 통한다』의 후속편이랄 수 있다. 원래의 원고에 텍스트와 주변 인물에 대한 글을 추가하여 독자들이 인물과 텍스트를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고전 톡톡』이 텍스트에 길을 내는 해석의 작업이었다면, 『인물톡톡』은 스승을 찾아 헤매는 편력기랄 수 있겠다. 이름하여, ‘남산강학원의 수업시대’! 두 권의 ‘톡톡’ 사이에 달라진 게 있다면, 남산자락 바로 아래로 이사를 옴으로써 바야흐로 ‘남산골 딸깍발이’의 면모를 그럴듯하게나마 갖췄다는 것. 명실이 상부하게 사는 일만 남았다. 난 종종 우리의 공부가 일종의 ‘확성기’ 같은 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의 목소리들을 다른 언어와 음색으로 지금에 전달하는 확성기. 얼마간의 음성변조와 잡음이 있겠으나, 어쨌든 우리-확성기를 통해 과거의 목소리들이 독자에게 시끌벅적하게 가 닿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디, 우리가 스승들을 만나면서 느낀 환희와 좌절과 뭉클함이 독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북드라망이 새로운 공간을 얻어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조각난 파편 같은 글들을 이렇게 근사한 책-작품으로 엮어 주었으니, 이들이야말로 21세기의 연금술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 인연이 소중하고, 든든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북드라망의 책들이 나올 때마다 세상의 거대한 인드라망이 차르르 ‘빛발치기’를. 북드라망의 건투를 빈다. 임진년 폭염 속에서 저자들을 대신해 채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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