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Prologue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 책을 시작하고자 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 본부에서 근무하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 회의를 거쳐 같은 해 12월 22일, 그는 종신 유형 판결을 받고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명예 퇴역식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1일 밤, 아프리카 기아나 적도의 프랑스령 ‘악마도’라는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드레퓌스는 그곳의 돌 감방에 홀로 수감된 채 비인도적인 처사, 살인적인 더위와 싸우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프랑스 참모 본부가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지목하면서 제출한 증거는 딱 하나, 프랑스 정보국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몰래 빼내 온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진술이었다. 아니, 여기에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고 간 한 가지 사항이 더 있었다. 바로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무언가 미심쩍은 점이 있음을 간파한 신문 기자 등이 진상을 추적했고, 프랑스 군의 양식 있는 군인 피카르 중령은 군 수뇌부가 은폐한 증거를 찾아내어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독일에 넘겨준 사람은 드레퓌스 대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드레퓌스의 필적과 유사하다며 제출했던 서류의 필적이 사실은 헝가리 태생의 프랑스 군 소령 에스테라지의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군 수뇌부는 이처럼 명명백백한 증거를 입수하고도 오히려 피카르 중령의 입을 다물게 했고, 드레퓌스의 가족에 의해 고발된 에스테라지 소령은 군사 법원의 형식적인 심문과 재판을 거쳐 1898년에 무죄로 방면된다. 진범이 누구인지 군 수뇌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은 ‘악마의 섬’에 유배되었고, 진범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프랑스 군의 장교로 근무하면서 안보와 관련된 기밀을 다루었다. 프랑스 군 수뇌부에서는 피카르 중령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판결을 뒤엎을 경우 프랑스 군의 위신이 손상된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에스테라지 소령이 무죄로 방면된 다음 날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장문의 논설을 발표했다.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형식을 띤 「나는 고발한다」를 통해 에밀 졸라는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프랑스 사회의 양심에 호소했다. 졸라의 이 글로 인해 프랑스 사회는 들끓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지식인을 비롯한 사회당ㆍ급진당이 가담한 인권동맹과, 국수주의 지식인ㆍ교회ㆍ군부가 결집한 조국동맹으로 프랑스 사회가 분열되면서 ‘드레퓌스 사건’은 한 개인의 재판을 둘러싼 정의 실현 차원을 넘어 프랑스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가장 첨예한 정치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의 유죄를 증명하는 새로운 증거들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인, 언론인, 변호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새로운 증거물을 제시하라고 요구했지만 프랑스 군부는 기밀문서들을 공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로 대중을 위협했다. 그리고 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새로운 증거를 들어 드레퓌스에게 다시 한 번 유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애초에 드레퓌스의 유죄를 증명할 새로운 증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때 제출된 증거는 날조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증거 서류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대중의 의혹은 나날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 제기된 증거 서류 필적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는 명백한 증거, 그리고 드레퓌스를 끝까지 범죄자로 몰고 가려 했던 조작된 증거물 등 사건의 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확실한 사안들이 널렸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 회의에서 드레퓌스는 다시 유죄를 선고받는다. 하지만 여론을 의식한 대통령의 특사로 인해 드레퓌스는 결국 유배지인 악마의 섬에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드레퓌스는 끝끝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프랑스 군을 상대로 기나긴 법정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결국 그는 1906년 7월 12일, 최고 재판소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는 군인으로 복직했을 뿐만 아니라 레종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그가 복귀 의식을 치른 뒤 연병장에서 빠져나왔을 때 자발적으로 모여든 20만 인파가 일제히 모자를 벗어 들고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처음 프랑스 정보국이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빼내 온 문제 서류의 수신인이었던 독일 대사관의 무관(武官) 슈바르츠코펜은 1917년에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 “프랑스 사람들이여, 들어보시오. 드레퓌스는 죄가 없소이다. 모두가 거짓이고 모략이었소. 그에겐 티끌만 한 잘못도 없었소.” 슈바르츠코펜의 이 고백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은 1895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10년 넘게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의 진면목이 사실은 허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었다.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두 차례의 전투에 참가하고 공을 세워 중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1935년 7월 11일, 오랜 투병 끝에 사망했다. 프랑스 군부의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끝내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존엄성을 지켰던 드레퓌스는 과거 프랑스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이자 고귀한 인간상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있다. *** 내가 왜 ‘드레퓌스 사건’으로 이 책의 시작을 열고 있는지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독자 여러분도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 전에 한 가지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나는 드레퓌스처럼 고귀한 사람이 아니며, 내가 겪은 일들 역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과 내가 겪은 일들 사이에는 유사한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그것은 공권력의 광기, 그리고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국가 조직의 위신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서라면, 아니 그보다는 자기네가 구축한 권력의 아성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한 개인의 삶 따위는 얼마든지 파괴해도 좋고 진실을 조작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우리 사회 지배층과 위정자들이 가진 생각이다. 나는 지난 1992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기간을 모두 합하면 8년이 조금 넘는다. 그 기간 동안 아내는 아이들을 홀로 키웠고, 아이들은 중범죄자를 아버지로 둔 채 청소년기를 지나야 했다. 공교롭게도 내가 연루되었던 그 두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뒤흔들었던 중요한 변곡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그 역사적 현장의 주인공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힘 있는 자들이 만들고 연출한 무대에 억지로 불려나가 제물이 되었을 뿐이다. 그 무대 위에는 ‘모래시계 검사’라는 엉터리 삼류 작가가 등장하고, 세 치 혀로 국가 기관과 국민을 우롱한 희대의 사기꾼과, 그 사기꾼에게 농락당한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은폐하려 했던 공직자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과거의 악연에서 벗어나 어엿한 중견 기업가로 자리 잡았고, 살얼음판을 걸어왔던 가족들은 이제야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다. 이제 예순을 넘어서는 나이, 이렇게 조용히 지내면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다가 간다면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싸움을 시작하려 한다. 이 일을 시작하려 했을 때, 가족은 나를 말렸다. 왜 또 다시 그 험난한 기억 속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그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지금 내가 시작하려는 이 일로 인해 나는 애써 잊으려 했던 아픈 기억들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나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는 막강한 힘 앞에 서야 하는 힘든 여정을 또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싸워야 한다. 내 이름은 여운환. 지금도 인터넷에서 내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국제-PJ파 두목’, ‘○○○ 게이트’ 등의 연관 기사가 뜨고, 포승줄에 묶인 채 법정에 출두하는 사진도 뜬다. 한마디로 ‘거물급 주먹’이자 사회 각계각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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