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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해요, 미스 젬!

부탁해요, 미스 젬!

주희서 (지은이)

Fioret(피오렛) :삼양출판사·2017-11-28

  • 383쪽
  • 문학
  • KDC 8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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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22. [막간극] 경계에 선 자 은색으로 보일만치 결 좋은 흰머리, 매끄러운 피부, 그린 듯한 미소. 화면에 비친 남자의 모습은 20년 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세월을 모르는 남자, 유라레의 살아 있는 위인, 닥터 유리. 본이 티비를 껐다. 거짓말처럼 정적이 내렸다. 멀리 창밖에 자동차 지나는 소리가 났다. 희미한 사람 소음도 뒤이었다. 넓디넓은 거실에 조용한 한기만 돌았다. 본이 소파에서 일어나 유리창 앞에 섰다. 화려한 도시 야경이 별빛처럼 흩어졌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개미 행렬처럼 차가 늘어섰다. 노랗고 빨간 불빛이 수시로 깜박이며 시냇물을 이루었다. 고즈넉한 유라레 왕성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본에겐 익숙한 듯 낯선 광경이었다. ‘지금 여기 카피레가 있었다면 야경을 배경으로 우주 왕자 컨셉을 잡아 보자 했을 텐데…….’ 헛웃음 치던 본은 유리창을 힘껏 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떨어진 유리 조각에 지나던 행인이 봉변이라도 당하면 큰일이었다. 본은 대신 유리창에 이마를 박았다. 자신의 행동에 타인이 무슨 영향을 받을지 고려하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 아닌가.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본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부릅뜬 눈에 색색의 야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닥터 유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이었다. 유리는 성심성의껏 본을 치료했다. 본은 치료를 명목으로 몇 주간 실험관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진통제에 잔뜩 절인 젓갈이 된 기분이었다. 분명 가슴이 뚫려 죽었다고 생각했건만, 희미한 흉터만 남았을 뿐, 자신은 사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가슴에 구멍을 뚫은 사람도, 구멍을 막은 사람도 유리였다. 병 주고 약 주고의 극치였다. 유리는 본의 기막힌 심정을 짐작도 못 하는 듯했다. “이렇게 크게 다치다니, 아비 마음이 아프다”, “친구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군요. 본이 정 아쉬우면 새 친구를 만들어 줄게요” 따위 속 긁는 소리만 했다. 유리관을 쓰다듬을 땐 제법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으나 본은 알았다. 유리는 정해진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된다, 없앤다. 도움이 된다, 살펴 준다. 아들이 투정부린다, 들어준다. 가족이 다쳤다. 걱정해야 한다, 치료해 줘야 한다, 돌봐 줘야 한다. 유리는 엉망이 된 실험실을 그대로 두고,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위로를 몇 글자 뱉은 뒤, 불을 끄고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그것만으로 아비 된 도리는 다했다는 듯이. 본은 그때마다 애완용 햄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애초 기대도 희망도 버린 관계였다. 종지부를 찍을 기회가 필요했고, 그게 이루어진 것뿐이었다. 비록 그것이 예상치 못한 형태였다 하더라도. 삐삐삐, 알림음이 끊기기도 전에 현관문이 열렸다. “이야, 불이라도 좀 켜 놓고 있지 그러나. 에잇, 킁킁. 홀아비 냄새 한번 지독하군.” “……오셨습니까.” 성대를 긁듯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번 상처가 남긴 유일한 후유증이었다. 상대가 아무렇지 않은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나 기다렸나? 보나 마나 쫄쫄 굶고 있을 게 뻔하니 음식 좀 싸 왔다네. 왕자궁 요리장 솜씨야.” 보르누였다. 본이 말없이 소파에 다소곳이 앉았다. 보르누가 “응? 이렇게 보니 야경이 정말 끝내주는군. 누가 골랐는지 참 보는 눈이 있어. 그렇지?”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휑한 테이블에 하나둘 일회용 음식 용기가 올라왔다. 카피레와 곧잘 먹던 웰빙 식단이었다. 그리운 냄새였다. 본이 전투적으로 한 손엔 포크를, 한 손엔 스푼을 들었다. 나이프는 필요 없었다. 포크 하나로도 일격 필살이었다. “안 데워도 되겠나?” 본은 대꾸 없이 용기를 하나씩 비워 가기 시작했다. 쩝쩝대는 소리가 짐승 못잖았다. 보르누가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뺐다.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 보르누가 특별히 신경 써서 고른 펜트하우스였다. 실내 풍경이 구매 당시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소파에 대충 흐트러진 담요, 박스 채 놓여 있는 카피레 사진집, 기사 서임 때 받은 장검 따위가 본이 남긴 흔적의 전부였다. 거실 반쪽을 제외하면 다른 방과 복도는 버려진 창고나 다름없었다. 보르누가 익숙한 몸짓으로 박스를 뒤져 사진집을 한 권 꺼냈다. 카피레 사진집 중 초기작이었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금발 미소년 카피레가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보르누가 조심스레 첫 장을 넘길 때였다. 뒤에서 쩝쩝쩝 소리가 낙숫물처럼 떨어졌다. 보르누가 놀라서 뒤를 보았다. “더 없습니까?” “본 경. 그거 6인분이라네. 냉장고에 두고 먹으라고 가져온 거란 말일세. 자네 위장은 고무풍선인가?” “요리장님이 이것만 주셨을 리 없습니다.” 누가 왕자궁 사람 아니랄까 봐, 확신에 찬 어투였다. 입가에 튄 토마토 소스가 꼭 핏자국처럼 위협적이었다. 보르누는 어쩔 수 없이 현관 쪽을 눈짓했다. “디저트도 6인분을 싸 주더군.” 본은 두말없이 먹이를 찾아 돌진했다. 닥터 유리와 일방적으로 결별한 뒤, 본은 보르누를 찾아 성을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도저히 왕자궁에서 버틸 수 없다고 호소했다. 유리의 치료가 끝난 뒤, 본이 왕자궁에 머문 시간은 단 이틀이 전부였다. 시종장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어 긴가민가하던 보르누가 확신을 갖게 된 계기엔 본도 한몫했다. “조만간 랑퀴니에 군이 출장을 갈 예정인데…….” 본은 스푼으로 케이크를 떠먹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보르누가 마법등에 사진집 표지를 요리조리 비춰 보며 말을 이었다. “같이 가겠는가?” “어디에, 뭐하러 가는 겁니까?” “트리비아. 북쪽 국경 시모 산맥 근처라네. 문제가 생겨서 말이야. 마법석 수입 대부분을 의존하는 곳이거든. 우리로서도 섭히 대하기 힘들지.” “딴 사람 다 놔두고 왜 마과부 인간이 거길 갑니까?” 본이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싹싹 핥았다. 보르누가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 마법석 수입 관리는 마과부 소관이야. 그렇다고 닥터 유리나, 그놈 끄나풀을 보낼 수는 없잖겠나.” 본이 그제야 보르누를 보았다. 앉은 자리를 중심으로 빈 그릇이 둥글게 널려 있었다. “지난 기념식 때 한정판 사진집 사인본을 받아 간 그 동네야. 신간 소식은 없느냐 몇 번이고 넌지시 찔러 대더군. 그럴 상황이 아닌 걸 전 대륙이 다 알 텐데 말이야. 급기야 이번엔 생산량이 떨어졌다며 어깃장까지 놓지 뭔가.” “진짜로 떨어진 걸 수도 있잖습니까.” “다른 곳에는 멀쩡히 납품했다는 데도?” “수입량이 전혀 다르니까 그렇겠죠.” “……얼마 전, 그 주변이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네. 시모 산맥 어딘가에 초록 마녀가 산다는 거야.” 초록마녀. 본과 보르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은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본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었다. 잠시 물 내려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보르누가 “츳츳, 그러게 급하게 먹지 마라니까” 하며 일회용 그릇을 하나씩 치웠다. 성을 나온 뒤 거식증과 폭식증을 동시에 앓고 있는 본이었다. 보르누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먼 야경을 바라보았다. 은하수를 지상에 흩뿌린 듯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졌다. 괜히 말했나 싶은 한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랑퀴니에 군에게 무슨 일이 있을 경우, 본만큼 믿음직한 이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소리가 그쳤다. “……그냥 이쪽 애들 보내도 되고.” “제가 가겠습니다.” 아예 세수까지 마쳤는지, 본의 얼굴에 물기가 흥건했다. 보르누가 빈 용기를 봉지에 대충 쓸어 담았다. “왜. 우리 애들도 실력 좋아.” 본이 허공에 포크를 휙 던짐과 동시에, 무언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카메라였다. 귀에서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르누가 말없이 렌즈에 꽂힌 포크를 보았다. 당황한 통신이 고막을 왕왕 울렸다. 보르누가 별거 아니라며 통신을 끊었다. “이거 얼마짜린 줄 아는가.”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쓸데없는 거나 달아 놓고, 사람을 실험 쥐처럼 감시하고…….” “못 믿어서 그런 거 아닐세.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한 거지.”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본이 코웃음을 픽픽 날리며 보르누의 손에 든 사진집을 뺏었다. 카피레의 사진집이라면 죄 소장하고 있는 보르누가 유독 본의 사진집에 환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본의 사진집에는 한정판에도 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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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해요, 미스 젬! 3권 목차 22. [막간극] 경계에 선 자 23. 영원한 소년 24. 멀리서 온 손님 3부. 금서의 계약자 25. [막간극] 몇 개의 이름 26. 수도 귀환 27. 왕립중앙병원 21층 28. 왕성 잠입 작전 29. 대가 30. 진실 게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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