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데미안 식사는 한 사람 것만 준비되어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루시아는 기운이 쭉 빠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가뜩이나 넓은 식당이 더욱 광활해 보였다. “주인님께서 근래 공무가 많으십니다.” 제롬이 변명처럼 공작이 왜 오늘도 저녁 식사에 함께하지 못하는지 설명했다. “그렇군요. 혹여 부실하게 드시어 건강을 해하실까 염려되니 집사가 더 신경 쓰도록 해요.” “예, 마님.” 일주일째 루시아는 저녁을 혼자 먹고 있었다. 그는 침실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째 그의 얼굴을 구경도 못했다. 그는 무척 바쁘다고 했다. 집무실에서 온종일 일만 하며 식사도 모두 그 안에서 간단하게 해결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감은 그가 지금 그녀를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전에 가끔 일이 많아 루시아가 잠들 때까지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는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그는 새벽에 들어와 그녀를 끌어안고 잤다. 이렇게 계속 침실에 들어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었다. 천 년은 흐른 것처럼 길어서 뒤돌아보면 겨우 며칠이었다. 그는 일이 바쁠 뿐이었다. 겉보기에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일주일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될 수 있었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 해도 신혼부터 서로 원수 바라보듯 하는 부부는 없었다. 남처럼 지내는 부부는 다 어떤 계기에서 비롯되어 관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머리가 아파.’ 습관처럼 음식을 씹어 넘기지만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다. 겨우 식사를 마치고 안나에게 두통약을 받아 복용 후 침실로 들어왔다. 아침에 눈 뜨면 조금 괜찮아졌다가 밤이 되어 침대에 누우면 온갖 상념으로 잠 못 이루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왜 그랬어. 네가 망친 거야.’ 자책이었다. 왜 풍파를 일으켰을까.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을 위해서 그와 결혼했다. 그의 애정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와 계약까지 하며 분명히 했다. 거짓으로 계약만 해놓고 ‘나중에 혹시 모르는 거 아니야?’라는 약삭빠른 생각은 하늘에 맹세코 절대 하지 않았다. ‘그가 나빠. 차라리 처음부터 형식적인 부부로만 지냈으면.’ 그에 대한 원망도 있었다. 그가 그렇게 다정히 대해주지만 않았어도 평생 고독을 각오했던 그녀의 결심이 무너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인제 와서 칼로 베어내듯 딱 끊어버린 그의 태도는 그녀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자신을 비웃었다. 다정한 남편의 태도를 원망하다니. 언어도단이었다. ‘네가 선택했잖아. 후회는 절대 안 할 거라고 다짐했잖아.’ 또다시 자책이었다. 아이는 처음부터 아예 포기하고 있었으면서 왜 갑자기 욕심을 부렸을까. 쥐고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고 욕심을 부리다가 잡은 것마저 놓치게 생겼다. 얼마 전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걸 그녀가 망가뜨렸다.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다. 루시아는 일어나 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고 두 팔로 무릎을 감쌌다. 열리지 않는 침실 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가슴이 너덜너덜하게 멍들어갔다. * * * 빠르게 서류를 읽고 아래에 서명했다. 따로 살펴볼 필요나 의문이 있는 사항에는 표시해 두고 옆으로 넘긴다. 왼쪽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 오른쪽에는 처리한 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무리 눈이 빠지라고 서류를 읽고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며 일을 해도 왼쪽의 서류들이 바닥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 휴고는 내던지듯 펜을 내려놓고 몸을 뒤로 기댔다.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서는 이걸 해야 하고 저걸 해야 하고, 해야 할 일들을 그리고 있었다. 지긋지긋하다. 얼마나 이 짓을 더 해야 하나. ‘10년?’ 10년이면 녀석이 몇 살이더라. 열여덟 살. 그때야 겨우 학술원을 졸업할 나이였다. 10년으로는 안 되겠다. 15년이면 되려나. 아둔한 녀석이 아니니까 4,5년 가르치면 쓸모 있을 것이다. ‘15년이라…….’ 아무리 최소한으로 잡아도 아득하게 멀었다. ‘이 짓을 15년을 더 해야 한단 말이지.’ 비가 오느라 어둑한 바깥 하늘을 창을 통해 내다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비가 왔다. 그는 처음에는 창가로 아예 시선조차 두지 않았으나 결국 사흘 전부터는 발코니로 나가지 않은 채 정원을 거니는 그녀를 훔쳐보았다. 자신이 얼마나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비 때문에 그녀를 오늘 보지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데.’ 그는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한심한 새끼. 가서 보면 되잖아.’ 멀리도 아니고 계단을 내려가 조금만 가면 금방이었다. 지금 이 시각이면 그녀는 대개 1층 응접실에 있었다. 그녀의 생활은 단조롭고 단순했으며, 거의 하는 일이 정해진 것처럼 규칙적이었다. 요즘은 외출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자기 일정보다 그녀의 일정을 꿰고 있었다. ‘내가 이런 병신 짓을 할 줄이야.’ 지금 그는 아내를 피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사랑? 웃기는군.’ 그는 끊임없이 부정했다. 그의 마음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었다. 누군가로 말미암아 절대 흔들릴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하면서도 그녀를 만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모두 다 무너질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밤늦도록 집무실에서 서류만 들이팠다. 식사도 집무실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자정이 넘어서 집무실에서 나와 지난 몇 개월간 사용하지 않았던 자신의 침실에서 잠을 잤다. ‘그녀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어.’ 시험을 해보겠다는 핑계였다. 그의 냉철한 이성이 그에게 찌질하고 비겁하다고 비웃었으나 그는 외면했다. 첫 하루 이틀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내가 여자 하나에 좌우될 리 없지.’ 그는 철없는 아이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런 자신감이 무너지는 건 금방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묘하게 기분이 저하되고 서류 내용이 머릿속에서 헛돌며 일 처리 속도가 형편없이 떨어졌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효율이 떨어지니까 일하는 시간은 늘어났다. 자신답지 않아서 불쾌하고, 일은 더 손에 안 잡히고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그래도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금단 현상을 부정하며 똥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변에는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따끔히 야단칠 사람이 없었다. “전하.”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늘 일거리를 한가득 가지고 들어온다. 들어오라고 하자 역시 빈 몸이 아니었다. 공작의 서기관 중 하나인 행정관리 아신은 사납게 자신을 바라보는 휴고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꿋꿋하게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책상 왼쪽에 올려놓았다. 슬금슬금 나가는 꼴이 얄미워서 휴고는 툭 던지듯 물었다. “그 녀석 방학이 언제지?” 아신은 느닷없는 공작의 질문에 진땀이 났다. 다행히 명석한 머리는 그런대로 늦지 않게 답을 찾아주었다. “……방학은 따로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이 방학을 언급할 존재라면 한 명뿐이었다. 차기 공작 위를 이을 후계로 지정된 공작의 하나뿐인 아들, 데미안 타란. 사생아지만 죽고 싶지 않고서야 공작 앞에서 그 단어를 입에 올릴 자는 없을 것이다. 아예 사람들은 누구도 대놓고 데미안의 존재를 거론하지 않았다. ‘다들 여전히 설마 하는 것 같지만.’ 바뀔 수 있는 일이라고 사람들은 은연중에 생각하고, 그러기를 바랐다. 공작은 아직 매우 젊었고 이제 막 결혼했다. 말은 못해도 사생아가 공작가의 정통을 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변이 없는 한 후계는 사생아 도련님이 될 것이라고 아신은 확신했다. 공작께서 다 불러 모아놓고 공표한 일이었다. 공작은 한 번 입 밖으로 꺼낸 일은 번복하지 않았다. 공작 후계의 등장은 일대 파란이 일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엄청난 스캔들이 널리 퍼지지 않은 건 사람들이 알아서 입조심한 덕이었다. 사생아가 장차 주인이 될지 모른다는 불편한 심기 때문에 공론화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요란한 신고식 치른 것치고는 두 부자 사이가 영…….’ 공작은 아들이 여섯 살이 되자마자 기숙 학교에 넣어버렸다. 오히려 주변에서 만류했다. 너무 어리시니 한두 해 더 있다가 생각해 보심이 어떠신지요, 했더니 공작은 코웃음 쳤다. ###회상### 「어려? 여섯 살이면 사막에 던져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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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2권 목차 1. 데미안 2. 아버지와 아들 3. 사랑과 이해, 그리고 가족 4. 진실 & 거짓 5. 타란 공작 가문의 주치의 6. 수도 상경 7. 수도 사교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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