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공작부인 비비안 언제나 마찬가지로 타란 공작과 왕의 점심 식사가 끝나고, 가벼운 주제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시종장이 들어왔다. “폐하. 타란 공작께서 알아보기를 청한 일이 있어 고하려 하옵니다.” 퀘이즈는 식사 시작 전에 휴고가 시종장을 불러 무슨 말을 하는 모습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말해 보아라.” “예. 타란 공작부인께서는 왕비 마마와 점심을 드시고 장미궁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하옵니다.” “아. 오늘 공작부인이 입궁한다는 소리는 왕비에게 들었지. 입궁한 건지 확인하려 그랬나? 별나기는. 어련히 잘 왔을까.” 휴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디를?” “안사람이 들어왔다니 같은 공간에 있는 김에 보고 오려 합니다.” 궁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언제부터 같은 공간이라는 좁은 단어로 묶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퀘이즈는 찻잔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설명이 필요하군. 다급히 공작부인에게 전할 말이라도 있나? 그거라면 시종을 시켜도 될 텐데.” “꼭 전할 말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있다 해도 시종을 왜 시킵니까. 대화는 얼굴 마주 보고 하는 겁니다.” “…….” 분명 타란 공작은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데 퀘이즈는 외국어처럼 들렸다. 말하는 겉뜻은 알아듣지만, 말하는 사람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대화의 정의를 가르쳐 주는 건가?’라고 퀘이즈는 생각했다. 휴고는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오후에는 회의가 있다. 얼굴 잠깐 보고 올 시간밖에 없었다. “회의에는 늦지 않게 오겠습니다.” 휙 나가 버리는 휴고를 잡을 수 없었다. 퀘이즈는 한참 고민하다가 부관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단순히 이 상황을 해석하면?” “……타란 공작이 공작부인을 보고 싶어 만나러 간 것 같습니다만.”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야.” 상황은 알겠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집에 가면 매일 보는 얼굴이 왜 보고 싶은데? 한창 불붙은 연인들이나 하는 짓을 결혼한 지 1년이 훌쩍 넘은, 더구나 타란 공작이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뭔가 심오한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퀘이즈는 깊은 사색에 빠졌다. 데이빗은 누님을 만나러 입궁했다가 누님이 손님을 맞아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을 들었다. 앉아 기다리기 지루해서 누님을 찾아 나섰다. 장미궁으로 가셨다는 말을 듣고 천천히 그리로 갔다. 얼마 전 누님께 야단을 듣고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데이빗은 누님과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다. 만나면 자꾸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해도 베스는 데이빗이 어쩌지 못할 위치에 있는 몇 사람 중 하나였다. 왕비이며 장차 왕의 모후가 되실 누님과 사이가 나쁘면 저만 손해였다. ‘누님은 여전히 날 어린애처럼 보시지만 두고 보라지. 언제고 날 달리 보실 테니까.’ 왕이 중요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자신은 그런 부류 중 으뜸이었다. 대관식 후부터 왕은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벌일 것이다. 중요한 임무를 맡을 선봉장은 반드시 자신이 맡게 될 거라고 자신했다. 그때를 위해 데이빗은 부지런히 젊은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이 빛을 발할 날이 올 거라고 굳건히 믿었다. 장미궁에 가까워질수록 진한 향이 밀려왔다. 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에게 내린다는 장미궁은 선왕의 살아생전에는 내내 비어있었다. ‘대관식이 끝나면 마땅히 장미궁은 누님의 것이 되어야 해.’ 계속 비어있었던 장미궁에 아주 잠시 공주 하나가 머문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 공주가 타란 공작과 결혼했다지.’ 타란 공작 위세가 참 대단했다. 보나 마나 그 공주가 장미궁에서 지내고 싶다고 졸랐을 것이다. ‘공주는 무슨. 왕족이니까 공주라 해주지 귀족이었으면 그냥 사생아잖아.’ 데이빗은 타란 공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폄하하고 싶었다. 잠시 딴생각으로 길을 잘못 들어 입구가 아닌 정원으로 들어섰다. 데이빗은 돌아가야 한다는 성가심에 투덜거렸다. 갑자기 바람이 훅 밀려왔다. 여름 바람치고 제법 강해서 바닥 가득 쌓여 있던 꽃잎이 회오리가 되어 데이빗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찌푸려 바람을 피하고 제대로 시야가 트였을 때, 데이빗은 발치로 날아와 나뒹구는 모자를 발견했다. 레이스로 풍성하게 장식한 모자는 확실히 귀부인의 것이었다. 모자를 집어 들고 일어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데이빗은 그대로 굳었다. 날아간 모자 때문에 당황하는 여인이 데이빗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호수 표면처럼 여인이 입은 드레스가 빛을 냈다. 햇살이 통과할 것 같은 하얀 피부는 금방 사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주변 가득 흐드러지게 핀 새빨간 장미꽃잎처럼 유난히 붉은 입술이 선명했다. 데이빗은 환상적인 장미 정원의 분위기와 달콤한 꽃향기와 부드러운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여인에게 그야말로 한눈에 반했다. 데이빗은 모자를 들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사춘기 소년이 첫사랑을 느낀 것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한참 결혼 말이 오가는 약혼녀 얼굴 따위는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다. 여인 곁에는 시녀가 있었지만, 안중에 없었다. 여인으로부터 한 걸음의 거리까지 다가가 정중하게 모자를 내밀었다. “아름다운 귀인의 마음을 담은 모자가 제 발치로 날아왔기에 돌려드립니다. 부디 담긴 마음을 제가 품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루시아는 모자를 받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이런 말을 얼굴색 하나 붉히지 않고 할까. 이렇게 노골적인 남자의 유혹을 받는 일은 처음이라 루시아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넓은 장미 정원을 돌아보고 싶어서 왕비의 양해를 얻어 산책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돌풍에 모자가 날아가 당황했고, 낯선 남자가 주워 다가와서 더 당황했다. 곁에 함께 있는 하녀와 왕비가 붙여 준 시녀가 든든했다. 저택 밖에서는 절대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롬의 조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돌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구나.’라고 루시아는 생각했다. “모자를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아는 이 상황 자체가 낯설어서 웃었지만, 데이빗 눈에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우십니다. 저는 라미스 공작가의 데이빗 라미스 백작입니다.” 데이빗이 자신을 소개하자 루시아는 꿈속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라미스 공작의 장남이었다. 파티장에서 여러 번 보았다. 타란 공작 못지않게 추종자들을 끌고 다녔다. 두 남자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파티장에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가끔 그런 날은 두 무리의 집단이 만들어졌다. 루시아는 데이빗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호인처럼 굴지만 오만했다. 타란 공작은 당당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오만함이라면 데이빗은 타인을 아래로 깔아뭉개는 오만함이었다. 순전히 루시아의 주관적인 시선이었다. 꿈속에서 루시아는 타란 공작을 동경했고 좋아했으니까. 어쨌든 루시아는 데이빗의 웃는 얼굴을 보면 항상 위화감이 들었다. 얇은 가면을 얼굴에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다가 아주 우연히 데이빗의 본 얼굴을 보는 일이 있었다. 대단히 큰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잠시 인적이 드문 구석진 곳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뭐? 그게 정말이야?」 큰소리가 나서 살짝 보니까 데이빗이 어떤 남자와 함께 있었다. 「정말 아버님께서?」 「예. 아무래도 심중에…….」 이를 아득 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루시아는 흉하게 일그러진 데이빗의 얼굴을 보고 놀라 다시 숨었다. 살기등등한 표정이 항상 웃고 다니던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런데 어색함이 없다는 점이 섬뜩했다. 루시아는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한참을 숨어있다가 조심스럽게 홀에 나갔다. 불안하게 뛰는 심장이 오래 가라앉지 않았다. 메튼 백작과의 결혼 생활이 끝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 루시아가 하녀로 다시 사교계 소식을 접했을 때 라미스 공작은 노환으로 타계하고, 데이빗이 뒤를 이었다고 들었다. 타계한 라미스 공작의 차남이 사고로 죽은 지 꽤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하녀 일을 그만두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우연히 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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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3권 목차 1. 공작부인 비비안 2. 만나는 사람들 3. 각성 4. 어머니의 추억 5. 사랑합니다 6. Ever after 7. 건국절 파티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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