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모든 것이 제자리로 “당신에게 내가 면목이 없군.” 휴고는 모든 일이 다 마무리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녀에게 일어난 끔찍한 일, 생각조차 하기 싫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사건의 원흉은 모두 그와 관련이 있었다. 작당했다고 추측되는 라미스 백작과 팔콘 백작부인. 휴고는 그들이 어쩌다가 의기투합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둘 다 그에게 유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니까 아내를 겨냥한 것이다. 특히 팔콘 백작부인이 관련된 일이라는 점에서 그는 정말 그녀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의 옛 여자가 저지른 짓이었다.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그의 미진한 뒤처리가 빚어낸 결과였다. “내게 실망했겠지.” 루시아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오히려 위로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번 사건이 그의 탓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저, 길을 걷다가 의도치 않게 사람과 부딪쳐 사고가 난, 예기치 않은 연결고리로 엮인 관계였다. “실망하지 않았어요, 휴. 고작 이런 일로 당신에게 실망하지 않아요.” “…….” 휴고는 자신의 손등을 위로하듯 덮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 “당신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겪어야 할 일이었다면 감당하겠어요.” “……당신은 정말.” 휴고는 찬란하게 빛나는 그녀의 맑은 마음이 감격스러워서 정말 이 여자를 데리고 살아도 되는 걸까, 자신의 자격을 의심했다. “당신이 이번 일로 제게 미안해하기를 바라지 않지만,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뭔데?” 휴고는 그녀가 원한다면 천하라도 얻어서 바치고 싶었다.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고 싶어요. 제가 지켜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파요.” “보상해서 당신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하지만 당신이 고용인을 지킬 이유가 없어. 당신을 보호하라고 고용한 자들이야.” “맞아요. 그들은 절 보호하는 일을 하지요. 동시에 저도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크로틴 경이 저를 지켜주었고, 저 대신 당신이 크로틴 경을 지켜 주었잖아요.” 휴고는 하인 등의 고용인들은 편리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로이와 대등하게 두고 비교하는 그녀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대충 무엇인지는 파악했다. “그들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어요. 가족이 죽으면 아프고 슬퍼요. 하녀의 남은 가족은 자신의 딸, 혹은 누이를 죽게 한 자들을 원망할 거예요. 원망해 봤자 그들이 뭘 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잖아요.” 하녀의 남은 가족이 아내를 원망의 상대로 삼아 미워하는 상황은 휴고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보상을 해주면 원망을 안 하나?” “돈이 어떻게 사람 목숨을 대신하겠어요. 대신 진심 어린 위로와 충분한 보상을 해주면 위로가 되지요. 위로를 받은 사람은 금방 상처를 추스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휴. 그들에게 진심이 담긴 보상을 해주세요. 그들의 죽은 딸, 혹은 누이가 덧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고, 훌륭한 인재를 잃어 유감스러우며 충분한 보상으로 위로를 전한다고 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남은 가족을 만나고 싶지만…….” “그건 안 돼.” “네, 그러니까요. 저 대신 당신이 마음 써주세요.” “……알았어.” * * * 궁 안에서 공작가 후계가 살해된 사상 초유의 사건은 기사 크로틴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많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뿐이었다. 왕이 사건 종결을 선언하고 당사자인 타란과 라미스 두 공작가에서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사건을 찾아 관심을 돌렸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휴고는 파비안을 불러 남은 처리를 지시했다. 특히 왕에게 대가로 지급할 것들을 대충 정리해서 파비안에게 서류를 넘겼다. 파비안은 그 자리에서 대충 내용을 훑다가 안색이 퍼레지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목이 막혀서 침을 한 번 넘기고 공작에게 물었다. “전하, 정말…… 이걸 전부……?” 서류에 적힌 부분은 드러난 타란 가문의 재산 중 10%에 달했다. 타란 가문의 재산 90% 이상이 드러나지 않은 상태로 은닉되어 있었다. 그걸 따지면 그렇게 큰 부분은 아닐지 모르지만, 돈 앞에서 작아지는 파비안의 간 덩어리가 감당하기에는 어마어마했다. 그 미친놈 목숨 값이 이렇게 비싸다니! 파비안은 눈앞이 혼미해졌다. “돈 주고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싼 거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압니다. 알고말고요. 그래도 지나치게 통이 크십니다. 허어. 왕도 진짜 뻔뻔하기도 하지. 자기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빼가냐.’ 파비안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아까워 죽을 것 같았다. ‘마님 지참금으로 광산을 넘길 때부터 알아봤어. 주인이 이렇게 개념 없이 돈을 써대서 균형을 맞추자고 검소한 분이 안주인으로 오신 건가.’ 표정 변화 없이 파비안은 속으로 계속 구시렁거렸다. “죽은 하녀에 대한 보상은 보통 어떤 식으로 마무리하지?” “가족에게 시신을 넘기고 미지급한 보수가 있으면 정산하며 장례비용 및 얼마간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보상금이 얼마나 되는데?” “관례상 받던 연간 보수의 5년 상당액입니다.” 법제상 귀족이 평민을 죽일 경우 무죄는 아니지만, 거의 돈으로 배상하고 사건 종결이었다. 귀족들이 많이 몰린 수도를 제외하면 평민이 귀족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신분은 아예 거주하는 곳과 활동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다만 평민이 자진해서 귀족 영역에 발을 들인 경우, 즉 왕궁이나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일할 때에는 재수 없으면 죽는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그래도 많은 평민은 높은 보수 때문에 일자리를 얻으려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귀족 가문에서 10년만 일하면 가족을 모두 부양하고도 번듯한 집 한 채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신분제 국가가 그렇듯이 제논 역시 귀족 위주의 법으로 질서를 만들었다. 우연히 길을 지나가던 아무 죄 없는 평민이 귀족에게 죽은 경우가 아니라면, 하인이나 시종 등의 고용인이 높으신 분들 일에 휘말려 죽었을 때 온전한 시신만 제대로 돌려받아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했다. ‘보상금이 얼마 안 되기는 하는군.’ 휴고는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여전히 아내의 지나친 동정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해달라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못 해줄 이유는 없었다. “죽은 하녀의 남은 가족들에게 하녀가 받던 연급 50년분을 보상금으로 주고 장례식에도 사람을 보내서 위로의 말을 전해라. 남은 가족 중에 필요하다면 일자리 마련해 주고.” “…….” 파비안은 잠시 말을 잊고 주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비안이 대답이 없자 휴고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고, 파비안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녀 말고 로이에게 죽은 다른 자들은?” “왕실에서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궁에서 일하는 자들이 궁에서 당한 사고이므로 왕실에서 보상함이 원칙이었다. 퀘이즈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으로 손해가 없었다. 죽은 자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봤자 국고에 보탠 팔콘 백작부인 재산 일부에서 지급하면 되었다. 죽은 팔콘 백작부인은 왕궁에 독극물을 반입해서 왕의 시해를 모의했다는 중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받았다. 죽은 시신을 처형하고 작위를 박탈했으며 가진 재산 전부를 국고 환수 조치했다. “왕실에서 지급할 보상금도 그리 크지는 않겠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쪽도 비슷하게 처리해.” 아내를 지키려던 로이에게 죽은 자들이니까 휴고는 그냥 깔끔하게 전부 다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작의 집무실을 나오는 파비안의 표정이 묘했다. 파비안은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몸을 돌려 안쪽에 앉아 있을 공작을 생각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변할 수가 있구나.’ 파비안은 사람이 절대 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사람은 각자 타고난 기질이 있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은 어릴 때뿐이며, 바꾼다 해도 근본을 바꿀 수 없고 나이가 들어 형성된 사람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파비안의 뚜렷한 주관을 흔드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주군으로부터 죽은 하녀의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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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 4권 목차 1. 모든 것이 제자리로 2. 평화로운 일상 3. 끝, 그리고 시작 4. 에필로그 외전 1장 데미안 외전 2장 또 다른 미래 ― 필립 외전 3장 또 다른 미래 ― 휴고 외전 4장 Happily ever after 외전 5장 공작 부부의 일상 외전 6장 꿈과 현실이 만나는 곳 외전 7장 또 다른 미래 ― 데미안 외전 8장 모든 이야기의 시작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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