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Chapter 1. 붉은 달 아래 구덩이 윤수는 요즘 영 입맛이 깔깔한 게 도무지 식욕이 나질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번에 구상하고 있는 신작 때문이었다. 첫 번째 시리즈와 맞물려 연작 형태로 쓰고 있던 두 번째 소설을 마무리 지은 후로, 벌써 계절 하나가 훌쩍 흘러 있었다. 오랫동안 쓴 소설이 완결되면 기분이 몹시 후련할 것 같지만 정작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차기작 스토리로 가득한 머릿속은 매우 무거웠으며, 초조함에서 오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덕분에 오늘도 직원 식당의 맨 구석 자리에 앉아, 늘 한결같이 맛이 없는 코다리 찜을 그저 젓가락으로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간장 조림 냄새를 잔인하게 눌러 버릴 정도로 강렬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한 무리의 여자들을 우르르 몰고 내려온 것은 일명 여직원들의 실세라는 박지영 대리였다. “대리님, 오늘도 창가 자리에 아무도 없네요. 저기 앉을까요?” “좋지! 하루 종일 에어컨 아래 앉아 있었더니 햇볕이 그리워. 그런데 이런 명당자리를 매번 비워 놓다니, 우리 회사 사람들은 가끔 참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대리님. 다들 칙칙한 형광등 불빛이 더 좋은가 봐요.” 하이고. 애꿎은 반찬을 연신 쿡쿡 찌르며 그 말을 듣고 있던 윤수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창가 자리의 좋은 점을 몰라서 안 앉는 게 아니라, 못 앉는 거였다.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여직원 한 명이 멋모르고 그곳에 앉았다가 박 대리에게 불려가 얼마나 많은 훈계를 들었는가? 그리고 그 뒤로도 해당 직원은 각 부서마다 충실하게 심어져 있는 그녀의 심복들에게 찍혀, 갖가지 은밀한 괴롭힘을 당했다. 학창 시절, 반의 특정 친구들을 위해 수학여행 버스의 맨 뒷좌석을 비워놔야 하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처럼, 이런 규칙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그런 자들의 타깃은 대체로 언제나 비슷했다. 늘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아무리 괴롭혀도 절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존재. 무얼 숨기랴. 그녀들의 눈엣가시는 바로 저였다. 이제는 그 못된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오는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다. “흐음, 역시 잔 다르크는 오늘도 혼자네. 불쌍하게도.” “누구?” “이윤수 씨 말이야.” “아. 매일 부장님보다 일찍 퇴근하고, 회식 가서도 늘 먼저 일어선다는 그 용자? 그래서 별명이 잔 다르크라면서.” “용자는 무슨. 그냥 은따지. 진짜 저런 타입은 주는 거 없이 싫지 않아? 오늘도 봐라, 음침하기가 짝이 없다.”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그녀들은 또다시 윤수를 흘긋 곁눈질 했다. 심술궂은 고양이들. 매일 혼자 점심을 먹는 것도 사실이고 그런 별명이 있다는 것 역시 죄다 알고 있었다. 다만 정작 본인이 그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의 대처법은 그저 무시가 상책이다. “에이, 가자. 더 말하다간 밥맛 떨어질라.” 윤수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박 대리의 매서운 눈초리가 결국 배식대로 향했다. 과연 똥은 절대로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각자 식판을 받아 들고 마치 전세 낸 듯 창가 자리를 점령한 그녀들은,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내내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참. 어제 웹소설 ‘황자 시리즈’ 완결 났더라.” “어머! 대리님도 그거 읽으세요? 바서라는 작가가 쓴 ‘제2황자’ 말씀하시는 거 맞죠? 전 그거 무료 서비스로 뜨면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1황자 시리즈 재탕하면서요.” “난 벌써 캐시로 다 질러서 읽었지! 결말이 너무 궁금한데 그걸 무슨 수로 참아?” “으음, 그럼 나도 역시 유료로 봐 볼까. 유명한 분의 그림이어서 그런지 일러스트 표지도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나저나 그 2황자 시리즈도 재미있어요? 또 차원이동물이죠?” “어, 이번에도 남주가 이세계 황자의 몸에 빙의해서 과거로 돌아가는 스토리인데 완전 꿀잼이라니까! 이번에는 회차 중간중간에 삽화도 들어가 있어. 완전 강추!” 그 순간 아무런 미동도 없었던 윤수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배시시 퍼져 올랐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유추해 보건대, 앞으로 며칠분의 점심값 정도는 박 대리가 제게 캐시로 미리 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저를 따돌린다고 해서 원망할 수야 있겠는가? 오히려 점심 잘 먹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해야 마땅한 일이지. 그래. 제2황자 시리즈도 로맨스 판타지 소설로 1황자 때보다 더 야하고, 더 읽기 쉽게 썼지. 그러니 아마 박 대리 옆에 앉은 성희 씨도 곧 유료 결제를 하게 될 거다. 특히 그녀는 늘 무리와 화제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노력파니까. 따라서 여러분, 잘 먹겠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한 윤수는 기어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사실 그녀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인들 중에도 이것을 아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건 바로, 여고생 시절 팬픽을 즐겨 쓰던 이윤수는 이래 봬도 장르 소설 바닥에 회귀 및 차원 이동 키워드의 붐을 몰고 온 인물이라는 거였다. 요즘 유행하는 여러 장르 중에서도 로맨스 판타지 좀 읽었다는 팬들은 필명 ‘바서’를 모르지 않으리라. 일명 ‘로판’ 소설 입문자라면 교과서처럼 꼭 봐야 하는 게 바로 바서의 ‘황자 시리즈’니까. 그렇다, 그게 바로 그녀가 쓴 글들이다. ‘매일 잘난 척하느라 바쁜 박 대리야. 넌 사실 내게 상당한 양의 캐시를 보태주고 있다고!’ 한번 터진 웃음은 도통 멈출 줄 몰랐다. 주위를 오고 가는 다른 직원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춤이라도 추는 듯 어깨를 신명나게 들썩였다. 잔 다르크라. 실로 매우 마음에 드는 별명이 아닐 수 없었다. * * *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오늘도 사무실에 가장 먼저 씩씩하게 울려 퍼진 건 윤수의 목소리였다. 여름이라 해가 길었다. 덕분에 바깥은 어두컴컴해지기는커녕 아직 밝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외에 별다른 미사여구는 그녀에게 필요치 않았다. 할 일은 모두 마쳤다. 또한 제가 먼저 퇴근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일거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헐. 오늘도 이 주임님이 또 총대를 메 주셨네요. 아무튼 늘 쌀쌀 맞은 태도라니까. 얼굴도 꽤나 예쁘장하겠다, 조금만 더 살갑게 군다면 이미지가 엄청 달라질 텐데 아까워요.” “아니 그보다 말이야, 계속 저렇게 부장님한테 찍히면 대리 승진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몰라서 저러나?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마치 안줏거리 삼듯 저를 두고 찧어대는 팀원들의 입방아 같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텅 빈 엘리베이터를 전세 낸 것처럼 홀로 타고 내려와 바깥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이 상쾌함이 윤수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차가운 커피까지 한 잔 사들고 나니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더더욱 느긋한 여유가 실렸다. 카페인 한 모금으로 하루 종일 쌓인 피로를 잠시 달래는데,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이 정신 차리라는 듯 요란하게 울었다. 황급히 전화기를 꺼내어 들자, 매번 진동으로 해놓는 걸 잊어 부장님의 잔소리 폭격이 날아오게 만드는 밤 부엉이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퇴근하시는 길이시죠?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오랜 시간 함께 일을 해 온 출판사 담당자는 윤수가 얼마나 열렬한 칼퇴 신봉자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자신을 배려해 언제나 이맘때쯤 전화를 걸곤 했다. “네,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작가님께서 주신 그 차기작 시놉시스 말이에요. “네네.” 꿀꺽― 윤수의 가느다란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올 게 왔구나. 아마도 담당자는 편집부의 회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을 알려 주려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성공한 작가라 해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일단 편집부 반응은 좋았어요! 황가(皇家)의 소심했던 막내 공주가 훌륭한 여기사가 된다는 설정이 참 흥미로웠고요. 요즘은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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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 네 무엇이 되고 싶으냐 1권 목차 Chapter 1. 붉은 달 아래 구덩이 Chapter 2. 노르덴 숲 Chapter 3. 악역, 아인젠카이트와 마녀, 바서 Chapter 4. 꽃의 기사 Chapter 5. 특별한 힘, 특별한 사이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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