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 문 ? 정치에서 보편과 특수의 문제 최상용(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일반적으로 보편주의는 특수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특정의 지역 개인 집단을 초월하여 보편성을 가지는 사상과 운동을 가리킨다. 인간은 누구나 특수한 상황에서 태어나 나름대로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살다가 유한한 생명을 마감한다. 우리는 특정의 시간과 장소 그리고 무지의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언젠가는 신과 자연, 이성과 감성,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등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앎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상 속에서 공기처럼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가치도 그것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위해서는 어떤 행태로든 대상을 한정하고 분류하고 개념화하는 지적작업을 수반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관점이나 획일적인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그러나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접근방법이 바로 이원론이다. 특히 정치영역에서 보편과 특수의 문제는 끝없는 물음으로서 전체와 부분 이론과 실천 이상과 현실 원칙과 상황 등의 이원론과 함께 그 양자 간의 공존, 분극(分極) 융합의 현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 책의 주제인 정치적 보편주의도 우리가 정치철학의 역사에서 제기되어온 보편의 사상과 운동을 특수와의 내면적 관계에서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인식론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시대정신에 걸맞은 정치적 보편성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 이래 정치적 보편주의의 획을 그은 사상과 운동에 대한 성찰적 판단(reflective judgment)이 필요하다. 서양철학사에서 보편주의의 단초는 플라톤의 이데아이며 그의 이데아와 현상이 이원론의 출발이란 점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그리스 철학이 폴리스를 넘어 보편성의 논리를 구상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정치영역에서 보면 보편과 특수의 형식 논리적 이분법으로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미건조하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철학은 원천적으로 폴리스철학 즉 정치철학이며 이데아의 보편사상도 정치공동체인 폴리스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겐 소규모의 특수한 정치공간인 폴리스가 바로 정치적 보편주의의 도장(道場)이었다. 그래서 보편적 이데아의 체현에 가장 가까운 특수한 인간 즉 철인왕에게 폴리스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는 물론 고상한 거짓말(gennaion pseudos)까지 허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정치적 보편주의는 보편을 위한 보편이 아니라 보편의 특수화인 동시에 특수의 보편화로서 폴리스 철학의 철저화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로마로 이어지는 스토아사상의 전개과정에서도 우리는 자연법과 코스모폴리타니즘, 거기서 파생된 인류와 세계의 이미지에서 보편주의의 풍부한 자원을 찾을 수 있다. 스토아의 보편주의는 그 전 단계의 에피큐로스사상과 함께 폴리스 공동체의 멸망에 따른 허탈감, 오랜 기간 폴리스에 의존했던 인간 개인의 해방감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태어났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그리스의 제논은 우주는 로고스 즉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인간은 자연 본성적으로 이성적이며 이성을 보편성의 원리로 보았다. 스토아철학의 체계화를 추진한 크리시포스는 인간을 공동체적 동물(Zoon Koinonikon)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때의 공동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소규모의 자족적인 폴리스가 아니라 세계적 규모로 확대된 코스모폴리스였다. 이처럼 스토아사상은 인간이 특정의 국가나 집단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류를 구성원으로 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스토아의 정치적 보편주의야 말로 인류, 세계, 지구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산실이다. 정치의 이론 및 실천에서 스토아의 보편주의를 끈질기게 추구한 사람이 바로 로마의 철인정치가 키케로였다. 그는 스토아의 자연법사상을 세속화함으로써 보편적 원리로서의 스토아사상이 현실의 로마정치권력과 결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여기서 비로소 스토아의 정치적 보편주의가 보편주의적 체제 이데올리기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보편종교인 기독교가 제기한 “신 앞의 평등”은 보편주의의 종교적 선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를 원죄로부터 구제한다는 관점에서 기독교적인 역사철학을 구상하여 보편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고 중세 스콜라철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은 신의 세계지배의 이념인 영원법(lex aeterna)이 인간이성에 각인된 것으로 그 이성이 인간에게는 실천이성으로 나타나며 그 실천이성의 보편적 원리가 바로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것이다. 그 실천이성의 보편성은 훗날 스피노자와 칸트에 의해 도덕적 확실성(moral certitude)으로 자리 잡게 된다. 우리가 중세사회를 일원적 기독교 정신과 다원적 봉건체제를 결합한 정치체제로 파악한다면 기독교의 보편주의야 말로 중세신분사회를 정당화하는 보편주의적 체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18세기말 근대에 들어와 칸트는 입법자의 의지인 실정법과는 달리 자연법을 보편적 원리에 따라 각자의 이성이 인식하는 법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국내법 국제법 나아가 세계시민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칸트의 세계시민정치제제의 구상이야 말로 칸트의 정치적 보편주의의 핵심이다. 특히 칸트의 정치적 보편주의는 보댕이나 홉스의 국가주권사상이 주류였던 시대에 계몽의 등불로 보편주의적인 개혁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19세기 후 국민국가시대에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와 인터내셔널운동은 보편주의 사상과 운동의 또 하나의 축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근대 국민국가의 전개과정에서 칸트와 마르크스로부터 정치적 보편주의의 사상과 운동이 잉태했다는 것은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 후 역사의 진행과 함께 전자로부터는 자유주의와 평화 후자로부터는 사회주의와 혁명이라는 사상과 운동이 세계적 규모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혁명과 전쟁의 시대, 극단의 시대로 불리는 20세기에 들어와 이 두 정치사상은 각기 보편주의적 정치이데올로기로 조직화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 때는 이른바 연합국을 형성하여 독일나치즘 이태리파시즘 일본의 천황제파시즘을 축으로 하는 세력과 인류사상 최대 규모의 전면전을 치렀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각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세계적 수준에서 양극화함으로써 동서 냉전체제가 본격화 되었다. 특히 한반도의 냉전은 미소국제냉전과 좌우국내냉전의 이중구조를 이루면서 국가, 국토, 민족의 분단은 물론 개인의 내면 세계에 까지 자기분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947년 트루먼독트린으로 공식화된 미소냉전은 1989년 소련사회주의체제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그 후 이어진 동유럽 공산주의체제의 붕괴, 중국과 베트남 등 아시아공산주의국가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 등으로 한반도를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이 탈냉전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처럼 냉전의 붕괴에 따른 세계정치의 구조적인 변동으로 인하여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극단주의나 원리주의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탈냉전기에 접어들면서 민족과 문화의 특수성에서 파생된 각종 원리주의와 그 폭력적 형태인 테러리즘, 그리고 지구규모의 환경오염과 격차의 심화 등의 구조폭력이 또 다시 인류의 평화롭고 정의로운 삶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정치영역에서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학문적으로 재정의하고 그 목표 가치를 개별국가 및 지역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공허한 보편실재론이나 맹목적인 가치상대주의에 안주할 수 없다. 프로타고라스가 만물의 척도로 본 인간이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만물의 영장(靈長)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윤리적인 규범들은 특정의 인간사회의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이며 더욱이 인간주체의 능동성이 강조되는 정치영역에서 추구하는 보편성과 보편주의의 관념은 특정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구성물이다. 그런 점에서 실제론과 상대주의의 양극이 아니라 인간의 창의를 바탕으로 하는 구성주의(constru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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