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프롤로그 2011년 초가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병원에 내가 누워 있었다. 영어권 의사를 불러달라는 이 동양인의 요구에 응급실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10분쯤 지나자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녀가 나타났다. 푸른색이었을까, 초록색이었을까. 그 여의사의 눈동자는? “한 2주쯤 됐습니다. 오른쪽 눈 시력이 급속히 저하됐습니다. 푸른색과 초록색의 구별이 힘듭니다. 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 위스키와 와인은 많이 마셨습니다.” 겁에 질린 나는 그 긴 영어를 또박또박 빠르게 쏟아냈다. 그날, 40년을 살아온 한국에서도 해보지 않았던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경험했다. 2시간이 넘게 이탈리아 의료진에게 몸을 맡긴 채 낯선 이탈리아어에 부지런히 반응했다. 1차 검진 결과가 나왔다. “뇌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반응 신경에도 별다른 이상 소견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안과 검사를 해봐야 하는데, 우리 병원엔 안과가 없습니다. 소견서를 써줄 테니 근처에 있는 안과를 찾아가서 2차 검사를 받아보세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피자처럼 생긴 비행 물체를 타고 떠도는 나를 상상했다. ‘돌아가자.’ 아무런 계획 없이 한국을 떠나 아시아와 중동, 유럽을 떠돈 지 10개월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장님이 되더라도 말이 통하는 곳에서 제대로 된 진찰이나 한번 받아보자는 소박하고도 절박한 심경이었다. 이후 로마에 며칠 머물면서 귀국 항공권을 예약하고, 카타르의 도하를 거쳐 어머니가 계시는 경상남도 마산까지의 리턴 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한국의 안과 의사를 만난 날, 이태리어로 쓰인 ‘소견서’를 내밀었다. “아이구, 어쩌죠. 나는 이태리어를 하나도 못 하는데, 진즉에 좀 공부를 해둘걸.”이라며 웃는 그 앞에서 나도 함께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그가 믿음직스러웠다. 몇 가지 검사를 거쳐 한국 의사가 내린 진단은 심플했다. “망막에 안개가 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완치까진 한 3개월 걸릴 것 같은데, 심각한 병은 아니니 걱정 마세요.” 원인이 불분명한 급격한 시력 저하와 파랑과 초록이 구별되지 않는 다소 희귀한 안과 질환의 치료가 시작됐다. 그 3개월 내내 서둘러 돌아온 걸 후회했다. 죽을병도 아닌데. 다시 세상을 떠돌기가 쉽지 않을 텐데. 왜 그만한 병에 겁을 집어먹고. 돌아왔을까. 이탈리아 이후로 세워둔 계획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프랑스 파리에서 한동안 머물며 ‘페르 라세즈’를 찾아가 짐 모리슨과 발자크의 묘비 앞에서 취하도록 위스키를 마시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정글 속 호수에 밤이 내리면 나타난다는 전설 속 괴물과 수영을 하고 싶었는데……. 비단 나뿐일까? 후회는 인간 모두의 것이다. 후회 속에서도 시간은 간다. 이탈리아에서 허겁지겁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2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바로 그 해의 기억을 책으로 묶어낸다. 한동안 잠잠하던 마음 속 짐승은 다시 요동치고, 정주하는 삶이 아닌 떠도는 삶의 매혹이 다시 심장 속에서 혀를 날름댄다. 남아메리카의 땅 끝 파타고니아 혹은, 아프리카 사하라사막에 홀로 서 있는 꿈을 꾸곤 한다. 그 꿈이 비루하고 초라한 오늘의 현실을 견디게 해준다는 걸 애써 부정하고 싶지 않다. 다시 ‘떠돎’을 계획한다. 사르트르로 하여금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헌사를 바치게 한 체 게바라. 그가 말했다. “인간은 꿈의 세계에서 내려오는 존재이다.” 게바라 역시 혁명가이기 이전에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떠돌고자 했던 여행가였다. 나, 다시 흔들리고 있다. 멀미 같은 것, 아지랑이 같은 것, 도심에서 나도 모르게 찾게 되는 벤치들.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익숙지 않은 풍경 속에 나도 풍경이 되어보자. 문득,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모두가 말렸다.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잠이 왔다. 난 기계가 아니었거든 사랑하는 기계가 아니었거든 처음 연애를 걸 듯 비행하는 거야. 죽음과도 같은 고독이 나를 콩자반처럼 조려 놓겠지. 그 하늘은 콩만할 거야. 내가 그랬지. 익숙한 것들은 재수가 없다고 익숙한 땅에는 비마저도 꼿꼿이 서서 자란다고. 그래서 두통이 생긴 거야. 내 말이 맞았어. 내가 그랬지. 현기증이 날 거라고 나비처럼 현기증이 날 거라고 놀랍지도 않은 일에도 비명을 지를 거라고 세상에! 2013년 가을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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