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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매뉴얼

고독의 매뉴얼

백상현

(도서출판)위고·2015-10-20

  • 250쪽
  • 철학
  • KDC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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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프롤로그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던 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삶에 관한 더 이상의 미스터리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 모두가 삶의 허망함에 관하여 알고 있으며, 그것을 잊기 위해 가족을, 연인을, 동지를, 술과 텔레비전을, 명성을, 때로는 애꿎은 신을 욕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헛된 욕망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삶이 전개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기 때문이다. 삶은 그렇게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철지난 사변적 논쟁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의미에 관한 지식 하나를 덧붙이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어떻게 욕망을 조직하고 삶을 꾸려나갈 것인지에 관한 양자물리학 수준의 디테일을 뽐내는 처세술들은 이미 서점가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이 ‘또 한 권의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삶에의 지식이 아닌 죽음에의 지식, 무지에 관한 지식, 무의미의 의미 또는 사라짐의 욕망에 관한 욕망이었다. 어떻게 완벽히 사라질 것인가? 아마도 이 책의 주제는 그렇게 말해질 수 있겠다.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물론 이것은 거창한 죽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찾아오는 영웅적인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죽음들, 삶이라는 거대한 환영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매 순간의 소멸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앎에 의해 건설된 선명한 세계의 이미지로부터 빠져나가는 불확실성의 장면들에 관한 것이며, 그로부터 출현하는 유령들, 증상들에 관한 것이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불안의 감정은 진리의 전령들이다. 굳게 믿어왔던 세계의 단단함에 균열을 내는 사건은 도래할 더 큰 세계의 최초의 한 자락이다. 마치 정신분석가를 찾아온 환자의 혼돈스러운 감정이란 내일의 새로운 자아를 창안해낼 어지럽지만 활력 넘치는 마음의 재료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하여 나를 소멸시키는 기술은 나를 창안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죽음을 욕망하는 것은 삶을 욕망하기 위한 전제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삶의 전개가 아닌 중단의 순간들을, 희망이 아닌 절망한 자들의 세계관을, 소통이 아닌 고립과 고독의 매뉴얼을 소개한다. 만일 우리의 삶이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찾아 나서는 추리소설적 탐사의 여정과 같은 것으로 은유될 수 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그러한 탐사의 여정에서 오히려 실종되는 탐정들이다. 그런 식으로 전통적 인생-추리소설의 문법 자체를 거부하는 책의 이야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죽음과 소멸 자체의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움 또는 매혹의 정서만큼이나 진리의 잔혹함을 견디게 해주는 묘약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없다. 혹은 그것은 없음의 형식으로 있다. 지난 세기의 인문학이 우리에게 남겨준 최고의 유산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였으며, 그럼에도 진리를 사유하려 한다면 진리의 공백을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지식이었다. 이러한 견딤은 한 시대의 고정관념이 미끼로 던지는 사이비 진리들, 충만한 의미의 쾌락을 쫓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텅 빈 자리를 지탱하면서 그곳에서 자신만의 절대적 차이를 진리로서 생산해 내야 하는 요청을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생산은 자기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에 대한 포기를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서 죽음을 요구하는데, 진리의 그와 같은 잔혹함을 견뎌낼 의지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러나 매혹될 수는 있다. 라깡은 이것을 욕망이라고 불렀다. 죽음에의 매혹, 텅 빈 것에의 매혹. 그리하여 자신을 텅 비게 하는, 공백에의 동일시. 이 책은 바로 그러한 매혹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어느 평온했던 날 오전 문득 찾아온 섭식장애의 증상이, 또는 한밤중에 잘못 걸려온 전화 저편의 낯선 목소리가, 존재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이야기. 우연히 펼치게 된 낡은 화집의 한 장의 이미지로 인해서 세계를 거꾸로 횡단하게 될 어느 소년의 이야기. 그것은 흔들림의 쾌락, 망설임의 우아함에 매혹당한 주체들의 이야기이며, 빈혈처럼 찾아온 현기증의 아득함에 몰두했던 주체들의 이야기이다. 이제 시작될 책의 이 모든 이야기들을 횡단하면서 필자가 희망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책이 흔들리는 방식으로 당신들도 흔들리기를. 필자를 찾아온 유령들에 독자 역시 매혹되기를. 그리하여 일상을 지배하던 고정관념의 독재가 멈추고 새로움에 관한 사유가 가능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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