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프롤로그 철학의 슬픔 철학은 진리의 사건이 발생한 자리로 찾아가 그것을 모두에게 소개하는 작업을 한다. 철학자는 개별적이던 진리의 언어를 보편적인 영역에서 재해석한다. 더 쉽게 말해서 철학은 이국의 언어와과 같았던 진리 사건의 말들을 공용어의 차원으로 번역해낸다. 그리하여 모두가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자신의 삶과 비교하여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 철학의 작업은 일종의 번역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의 사건은 번역자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식의 언어가 진리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협소하거나 낡았기 때문일 것이다. 낡은 언어로는 새로움의 의미를, 협소한 언어로는 외부로부터 오는 목소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는 언제나 새로우며, 언제나 다른 곳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도래하게 만드는 절차와 효과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란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새롭게 확장된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이다. 철학은 이 같은 안내자의 외침에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리의 실현을 돕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누군가의 외침에, 비명이나 절규 또는 신음소리와 같았던 그것에 철학은 말을 찾아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철학은 그러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가? 철학은 무엇 때문에 모두가 외면하는 진리 사건의 소외된 장소로 찾아가는 위험을 감수하는가? 진리는 새로움의 출현을 두려워하는 낡은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기 십상이다. 철학은 어째서 권력의 이러한 억압을 뚫고 진리가 발생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 하는 것일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한 채로 위험한 미지의 매혹에 자신을 노출하는가? 이에 대해 수많은 대답이 존재한다. 철학자의 수만큼이나, 그 욕망의 다양함만큼이나 많은 수의 설명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선택하려는 단 하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철학이 슬퍼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지탱하는 정동情動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은 슬픔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은 다름 아닌 철학의 탄생 그 자체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직면했던 젊은 제자 플라톤이 경험한 바로 그 슬픔. 철학은 이 같은 슬픔에 대처하는 특수한 절차로서 탄생했던 것이라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필자는 주장하려 한다. 젊은 플라톤에게 스승의 죽음이 남겼던 상실의 슬픔은 세계의 불완전함을 알리는 가장 진실한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그에서 스승의 부당한 죽음은 그가 속한 세계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와 같았다. 상실된 진리의 트라우마. 그로부터 오는 슬픔은 애도할 것을 요청한다. 이후 플라톤은 스승의 죽음을 변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플라톤이 썼던 거의 모든 작품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의 형식을 취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서구 철학은 그렇게 해서 진리 상실의 슬픔에 대한 기나긴 애도의 절차로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는 자에게 사형을 선고한 도시의 낡은 권력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도래할 진리를 위한 변론의 형식을 취한다. 진리를 발음했던 소크라테스의 외침에 단어와 문장을 찾아주려는 강박증에 가까운 플라톤의 노력은 깊은 슬픔 속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문명이 철학이라는 절차를 발명하여 진리에 접근하려 했던 이유는 그처럼 슬픔의 정동이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을 진리에 다가서도록 만드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은 진리의 첫 번째 효과이다. 철학의 방황 그러나 슬픔이 끝은 아니다. 슬픔 다음에는 조난이 온다. 누군가 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의 상실을 슬퍼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이미 길을 잃고 방황을 시작한 것이라 간주될 수 있다. 억압된 진리를 슬퍼하는 것은 억압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슬픔을 야기한 세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계 속 그의 존재와 일상은 의미를 잃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속으로 추락한다. 일종의 철학적 우울이 진리의 상실을 슬퍼하는 자에게 찾아온다. 그리하여 조난당한 삶, 그 속에서 방황하는 주체는 진리의 두 번째 효과가 된다. 그래서 철학은 단지 슬퍼할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조난과 방황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조난당한 삶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자들의 방황은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하고 진리와 관련된 주체들은 단지 슬픔에 사로잡히는 것을 넘어서 조난당한 삶의 고통과 맞서야 한다. 만일 사정이 이와 같다면, 진리와 함께 슬퍼했던 철학, 그로 인한 조난에 동참한 철학은 방황의 고통을 멈추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은 궤도로부터 이탈한 삶의 불안을 정지시키고, 안정된 일상을 되찾아줄 수 있을까? 책과 강연을 통해 만나는 철학과 인문학의 지식들이 조난당한 우리의 삶을 구조해줄 것인가, 라는 질문이 던져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는다. 철학은 방황을 멈추게 하고, 삶을 안정시켜줄 것이라고.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철학은 조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방황하는 자들의 마음을 치유하지 않을 것이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이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임무는 조난당한 삶을 조난당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리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철학은 방황을 지지한다. 철학은 방황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응원하고 격려한다. 방황이 보다 멀리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지식은 방황이 지속될 수 있도록 고안된 필드 매뉴얼이다. 철학은 조난당한 자들의 삶이 오히려 더 진실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철학은 여정이 아닌 조난을, 안정이 아닌 방황을 선택하려는가? 철학의 시간 철학이 방황을 지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시간에 대한 통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것. 개인 또는 공동체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 진보해간다고 믿는 시간관념은 환상에 불과하다. 라깡은 자신의 임상이론을 통해 시간은 결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1) 인생을 하나의 여행처럼,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여정으로 사고하는 습관은 반복되는 시간의 정지된 속성을 은폐하는 가장 기만적인 환상이라는 라깡의 주장. 이것은 우리의 욕망이 타자에 의해서 결정된 이후 동일한 구조를 반복하는 도돌이표 운동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표현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만나는 세계의 무한한 이미지는 이미 결정된 욕망의 루틴이 반복되는 것을 숨기는 일종의 신기루였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학습된 삶의 패턴을 반복한다. 과거의 반복일 뿐인 현재 속에 미래를 위한 자리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삶을 여행으로 은유하는 사유는 가장 유치한 오해일 뿐이다.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타자의 인생 여정을 내 안에서 반복하는 우리는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 내 안에서 반복되는 타자의 시간. 그것은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정지된 시간, 즉 가짜 시간이다. 철학이 방황을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직 조난과 방황만이 사이비-시간의 환영적 흐름을 정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상성의 안정된 궤도로부터 벗어난 일탈만이 미래로 향하는 발걸음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철학에 의해 지지되는 방황은 그렇게 시간의 정지를 정지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귀족 집안의 자제로 정치가를 꿈꾸던 플라톤의 삶은 어떠했을까?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아테네 귀족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기나긴 방황을 시작하지 않는가? 예수를 따라 나섰던 사도들은 어땠는가? 예수의 죽음 이후 시작된 방황은 진리의 상실을 대하는 가장 진실한 태도이지 않았는가? 방황이란 고정관념의 권력으로 지탱되는 현재의 세계로 들어서는 입장권을 정중히 거절하는 행위이다. 조난이란 그렇게 세계의 시간이 우리 안에서 반복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우리가 위치하게 되는 진리의 바로 옆자리에 다름 아니다. 평온해 보이던 세계의 이미지가 흔들리는 순간, 우리를 찾아오는 조난의 사건들, 방황의 흔들림들은 비로소 진리의 여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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