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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도 당신이었다

길을 잃어도 당신이었다

백상현 글·사진

이다·2018-09-20

  • 253쪽
  • 128×200mm
  • 문학
  • KDC 8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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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그 길에서 생각합니다 걷습니다. 숨도 그리 가쁘지 않습니다. 넉넉한 시야, 가벼운 어깨, 배낭은 날짐승의 날개. 바람은 차지만 거세지 않습니다. 땅은 얼었지만 햇살은 충분합니다. 날은 흐리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닙니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기에 길이 외롭지 않습니다. 길이 있기에 걷고 머물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게 꿈길처럼 걷습니다. 길을 잃어도 그곳에 당신이 있음을 압니다. 그 길에서 당신을 생각합니다. 피아노와 소녀 당신 같은 날입니다. 레체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가녀린 빛줄기처럼 적막한 공간 틈새로 선율이 흘렀습니다. 맞은편 성당 계단에는 그 선율에 마음을 빼앗긴 몇몇이 턱을 괴고 앉아 감상에 젖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피아노 치는 남자의 얼굴이 빛났고, 손가락은 건반 위를 마음껏 유영했습니다. 갑자기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립니다. 엄마 손을 잡고 밤길을 가던 소녀가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모두가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소녀는 원을 돌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 모습을 담으려 했지만 요정처럼 프레임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 음악의 기쁨, 환한 웃음은 담지 못했습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프레임에 담을 수 없다는 사실에 힘이 빠져나갈 때, 소중한 것들은 늘 우둔한 나를 비껴갔음을 깨닫습니다.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붙잡아야 할 것을 놓치고 살아온 삶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연주가 슬퍼졌습니다. 소녀는 춤을 추었고, 나는 그 자리에 머뭅니다. 당신을 헤아리는 밤입니다. 슬픔을 보듬을 수 있다면 당신의 슬픔을 보듬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해가 지면 버거운 삶도 저물까요? 슬픔은 살아갈 힘이 될까요? 절망은 답이 없습니다. 밤의 대지는 깊이 품어 두었던 빛을 투사하기 시작합니다. 어둠 너머 아름다움을 찾는 눈. 어둠 속에서 빛을 보는 눈. 내 무딘 일상이 당신의 뒤척이는 날을 품을 수 있을까요? 슬픔은 살아갈 힘이 될까요? Che cosa avete bisogno? 오늘도 당신을 채우지 못합니다. 향긋한 발사믹 식초 한 스푼만 있으면 평범한 양상추도 상큼한 샐러드가 되지요. 신기하지 않나요? 삶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한 스푼만 있으면 되지요. 내게 필요했던 건 딱 한 스푼만큼의 여유였습니다. 그게 없어서 시들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여기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한 스푼만 있으면 된다는 것, 말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향기와 풍미가 좋은 제대로 된 발사믹 식초를 얻으려면 십이 년에서 이십오 년의 숙성 기간을 거쳐야 한답니다. 간단해 보이는 발사믹 식초 드레싱 샐러드도 기다림이 필요하지요. 그만한 시간이 내게도 필요할 테지요. 내일도 당신을 그리는 일은 여전히 모자랄 테지요. Che cosa avete bisogno? (당신은 무엇이 필요한가요?) 눈으로 씻는 밤 그 눈에 눈동자를 씻습니다. 겨울은 채 오지 않았습니다. 서리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린 날이 뜬금없이 떠오르듯 눈이 내렸습니다. 아이들이 떠난 미끄럼틀 위로, 네온사인에도, 여전히 계절에 굴하지 않은 잎들 위에도 내렸습니다. 창문에 몸을 기울이고 내다보면 영혼의 기울기가 느껴집니다. 이십일 그램. 영혼의 무게라지요. 존재의 가치로는 경박하리만치 가볍습니다. 열린 창틈 사이로 눈송이 몇 개 흘러 들어와 이마에 부딪히고, 눈동자 안으로 미끄러졌습니다. 눈송이의 무게는 영혼의 무게였습니다. 날숨의 무게였습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찬 눈에 눈동자를 씻습니다. 당신을 떠올릴수록 나는 늘 눈처럼 가볍고 눈동자처럼 따스해집니다. 당신을 걸었습니다 세상은 어둠에 잠겼습니다. 저 멀리, 명멸하는 불빛들이 어딘가 삶이 부대끼고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소복이 눈 쌓인 날, 불빛이 새어나오는 한지 창문 사이로 도란도란한 꿈들이 들리는 듯합니다. 도시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곳, 도시를 떠날수록 더욱 인간다울 수 있음을 아는 나이가 되었지만, 도시를 버리지 못합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이처럼 살아가는 걸까요?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오다 몸이 휘청거렸습니다. 도시의 경계를 넘어 치닫고 싶은 나를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비탈을 다시 걸었습니다. 그 길에서 무언가 후련한 대답이라도 들을 것처럼 휘적휘적 걸었습니다. 당신이 잠든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오늘, 안녕한가요? 흐르는 강물처럼 뜨거운 한낮이 지나고, 부드러운 바람들이 모이는 시간입니다. 저 멀리 에펠탑이 아스라하던 센 강의 늦은 오후, 그때의 나는 미소를 지었을 테지요. 사랑하고, 꿈꾸고, 슬픔에 눈물지었을 테지요. 누구나 그렇게 강을 건너갈 테지요. 그때 당신이 아는 나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무심히 떠나는 중이었을까요? 꿈꾸듯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았거나 급히 달려가던가요? 긴 여행을 끝냈거나 그제야 길을 시작했던가요? 당신과 나는 둘이 아니면서 둘이겠지요. 센 강 너머 따사로운 햇살이 그리워집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당신이 내게 머무는 날입니다. 길이 어디일지 모르지만 낯선 아침, 언제나 새로운 길이 펼쳐졌습니다. 들숨이 막히고 날숨은 술술 샜습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흐린 의식인지, 몽롱한 눈을 비비고 바라보는 풍경은 따뜻한 지열을 품은 어머니입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길이지만 문득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길을 잃어도 당신이 있음을 압니다. 몽생미셸 1 파도가 오가고, 비바람이 일고,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햇살이 쏟아지고, 무수한 날들이 그 위를 흘러갔겠지요. 그 한 모금에 취하듯 느지막한 탕헤르의 오후. 낯선 아프리카 대륙의 한 도시, 소박한 광장의 찻집, 민트티를 조심스레 들고 배달 가는 사내……. 그가 들고 있는 찻잔 속에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보았습니다. 저 작은 한 잔이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고, 누군가에는 잠시나마 기꺼이 친구가 되어줄 테지요. 내 앞에 놓인 것처럼. 그가 타준 민트티를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그 한 모금이 세상을 향기롭게 할 수 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느린 시간이 흐르고 있었고, 분주하게 오가던 잠시 느리게 사는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언제든 그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모든 것이 민트향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그가 타주던 민트티가 여전히 향기롭습니다. 이 낯선 곳에서 당신을 그리고 헤아리는 일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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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길 위에서 보내는 편지 그 길에서 생각합니다……017 피아노와 소녀……018 슬픔을 보듬을 수 있다면……022 흐르는 강물처럼……023 길이 어디일지 모르지만……024 눈으로 씻는 밤……025 당신을 걸었습니다……028 Che cosa avete bisogno?……030 몽생미셸 1……032 그 한 모금에 취하듯……033 당신으로 충분합니다……034 옛이야기……036 만나야 하는 이유……037 그 안에 스며들 때……038 밤을 걸어라……039 베네치아 푸른 바다……040 우러러 봅니다……041 푸른 저녁……042 플리트비체……044 할슈타트 호수에서……046 삶은 당신은……048 모스타르에서 마주합니다……049 천 번이 지난 후라도……050 해질녘 프라하……051 그처럼 가겠습니다……052 시계와 시간……054 우연한 동행……056 사이프러스가 있는 풍경……057 사하라 그 어디쯤……058 에잇벤하두에서……060 푸른 골목……062 하맘의 노래……064 사하라에서 보내는……066 그 마음이면 충분합니다……068 바람에 묻어야겠습니다……069 많은 얼굴들 중에……070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072 어디든 길은 있겠지요……074 마음이 쏟아지는 날……076 달의 여행……078 그로써 빛나던 시간……080 날지 않아도……082 # 길을 잃어도 당신이었다 그 겨울 속으로……086 동백꽃잎 흩날리는 날……088 아무 일 아닌 날이겠지만……090 빈 옷처럼……091 그만큼의 삶……092 저마다의 무게……093 에사우이라 어부들처럼……094 삶을 건너는 사람을 위한 독백……095 물드는 건 그뿐이 아니겠지요……097 베른 비……098 두 갈래 길……100 떠나는 사람의 노래……102 파리 메트로 악사……103 신트라의 안개……104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아침……106 바라보는 중……108 La Mer……110 그날의 연인……111 파리의 밤……112 풍경의 위로……113 골목길에서의 행방……114 가슴 뛰는 일……115 삶은 움직인다……116 풍경을 봅니다……118 그리움 끝……119 세상을 노래 삼아……120 천둥소리……121 사다리의 끝……122 레테의 강……124 붉은 지붕 시에나……126 그 길을 동봉합니다……128 누군들 삶이 아니겠습니까……129 한 덩이뿐이겠지만……130 집시 노인의 노래……131 마테라의 밤……133 우리는 모두 꽃……135 산다는 건……136 커피 한 잔 보냅니다……137 당신 때문입니다……140 지금도 그 강을……141 길의 저편……144 그 너머 빛……145 홀로 오르는 길……146 햇살을 보는 방법……147 가만히 있어도 달빛이……148 바덴 풍경 위에 그립니다……149 당신이 흐릅니다……152 The Kiss Klimt……153 희망의 색깔……154 # 당신에게 닿는 바람이기를 Dances with waves……158 낡은 테이블이 있는 풍경……160 내일도 굳모닝……161 몽생미셸 2……162 어디 쉬운 날이 있을까요……163 부라노의 마법……164 Tranguility Ⅰ……166 Tranquility Ⅱ……168 나는 어디에 닿을까……169 푸른 바람 불어오는 곳……170 어디에 뿌리를 내릴까요……171 동행……172 두 사람을 위한 자리……174 놀이기구처럼……175 Would you like a cup of coffee?……176 삶을 묻는다면……178 밤 루체른……179 나를 마중 나가는 길……182 우리가 함께한 바람들……183 에노테카 프로페르지오……186 그 고요에 서면……188 길의 모순……190 악수만으로도……191 그곳에서는 마음을 내려놓아도 됩니다……192 바이올린 악사처럼……194 사이프러스 한 그루……195 당신이 있기에 충분합니다……196 토스카나……197 파도치는 마나롤라……198 미처 채우지 못한 것은……200 리오마조레의 저녁처럼……201 SOLIDARITE……202 토스카나에서 부치는 편지……203 # 이 길의 끝이 어디라도 길을 잃어도 길……208 그 길에서의 재회……209 당신의 그늘……210 경계를 넘는 일……211 그립다는 건……212 마음의 색으로……213 걷는 이유……214 당신에게 향하는 속도……215 길을 잃어도 가야 할……218 눈길을 걸어야겠습니다……219 창문을 열어두는 까닭……222 시간을 두고 갑니다……223 사이프러스처럼……224 변하지 말아야겠지요……225 비에 젖은 시에나……228 길 위의 섬……229 리마트 강변의 연인……232 밤의 미덕……233 트루바두르……234 사막을 오르는 일……236 우유니의 별……238 살바도르 달리 사막의 키스……239 빙하의 시간……240 마음의 방향……242 솜사탕……244 그렇게 머무는 일……245 그처럼 살아야 한다면……246 무지개는 보이지 않지만……247 당신이라는 평화……248 걸으면서 그리는 일……249 자전거를 타듯……250 당신도 그처럼……251 고래가 하는 말……252 에필로그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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