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이 책은 선사禪師들의 대화를 모은 선어록禪語錄집이다.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대화 기록은 아니다. 선사들의 이러한 대화는 특별히 ‘화두’話頭라고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화두란 선불교에서 선禪 수행에 사용되는 간결하면서도 역설적인 물음 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선불교의 공부 재료들을 만나려 하고 있는 중이다. 화두는 다른 말로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말은 중국에서 법원의 재판 판례문 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화두는 시비를 가르는 판결문처럼 분명해야 하고 누구나 따를 수 있도록 절대적 경지와도 통한다. 흔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거나 동문서답 등으로 오해되는 선문답의 이미지는 사실에 있어서는 날카롭고 선득한 선어禪語들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모아 놓은 선어록들은 한 편 한 편이 화두요 공안이다. 하지만 또한 이 글들은 선사들의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 작품들 각각은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공부거리이지만 또 누군가에는 그저 재미있는 한 편의 이야기들이다. 어렵게 읽자면 평생의 고민이지만 쉽게 보자면 흥미진진한 생각의 덩어리들이라는 뜻이다. 선문답은 사실 아무리 가볍게 읽어 보려 해도 읽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통상적으로 선문답은 질문자와 대답하는 사람 사이의 대화가 상식(!)적인 의미 결합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물었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면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수미산須彌山.” 운문화상의 유명한 ‘수미산’ 공안이다. 이 공안에서 운문이라는 선의 고승을 찾아온 한 스님은 묻는다.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았는데 여기에도 허물이 있습니까? 이 스님의 질문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즉 불교는 작은 분별심도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떠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은 순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느냐는 것. 이에 대한 운문화상의 대답은 ‘수미산’이다. 통상적인 의미 흐름을 쫓아가자면 허물이 수미산만큼 크다(혹은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운문화상의 이 말은 스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운문화상의 이 말은 질문자의 질문에 대해서도 작동하고 질문을 피해서도 작동한다. 선문답은 이런 식으로 말과 말 사이의 의미 관계를 해체하고 질문 자체를 무화시킨다. 왜 의미 관계를 해체하고 질문 자체를 무화시키는가. 습관적으로 작동하던 말의 길을 순간적으로 단호하게 끊어 버림으로써 그 말 길이 끊어진 곳에서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길을 뚫어 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임제선사의 할喝이나 덕산화상의 방망이[棒]도 극한의 지점으로 상대를 내몬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그 자비심의 원천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칼에 숨통을 찔러 오는 자비심. 2. 하지만 문제는 금욕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아무리 선禪의 기봉이 높다 해도 화두라는 게 그 앞에서 누구든 깨닫기 전까지는 짓눌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 수행자를 위해서도, 나아가 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한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깊이와 무게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선은 자유이고 저항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말의 형식을 부숴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부서져 버린 자리가 이전보다 어설플 수도 있고 애써 새로 구축한 삶의 길이 더욱 허망하게 무너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말들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선의 세계에서는 씻지 못할 조롱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은 평등이다. 화두 안에서 선사들과 평범한 질문자는 사제 관계의 형식을 띠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관계가 위계적인 것은 아니다. 선은 오히려 위대한 것을 비천하게, 기이한 것을 평범하게 만든다. 아니 선은 위대한 것과 비천한 것의 차이를 무화시킨다. 기이한 것과 평범한 것의 가치를 비교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냥 소리 내어 읽어 보는 건 어떨까. 낭송하는 선문답. 뭔가 발칙하고 불경스럽지 않은가? 그 속에서 어떤 통쾌한 전복을 마주치게 될 수 는 없을까? 한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물었다. “반야의 본체란 어떤 것인지 여쭙습니다.”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조개가 밝은 달을 품었다.” 그 스님이 말했다. “그럼 반야의 작용은 어떤 것인지 여쭙습니다.”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토끼가 새끼를 뱄다.” 이 공안의 의미를 따질 수 있겠는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소리 내어 낭송하고 몸에 새겨 보는 것은 어떨까?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선을 선답게 읽는 특별한 방법은 없다. 하지만 선을 낭독하고 암송하며 소리 내어 읽는다는 말은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다. 누가 알겠는가. 이것이 사실은 ‘조개가 밝은 달을 품’고 ‘토끼가 새끼를 배’는 것일지. 3. 이 책은 『벽암록』碧嚴錄, 『무문관』無門關, 『종용록』從容錄 등 세 편의 선어록집에서 엄선하여 낭송(낭독)용으로 재편집한 편집본이다. 최소한 선의 동네에선 이름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고 곁눈질로 귀동냥만 해도 깨달음이 바로 육박해 들어올 것 같은 불후의 선어록들이다. 하지만 다 같은 선인 듯 보여도 선사들의 기풍이나 종파에 따라 주력해서 전하는 화두가 차이가 있고, 또 화두 자체가 이미 현재적 시공간 및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설명이나 이해의 전제가 필요한 경우들이 많다. 이 책에서는 이런 경우 과감하게 배제하는 쪽을 선택했다. 반면 소리 내어 읽는 동안 의미상의 단절이나 말의 길을 끊는 선 특유의 문장들은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해서 어떤 글들은 생각보다 유연하게 읽힐 것이고, 또 어떤 글들은 읽는 행위 자체가 생각의 무장 해제를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이 작업을 하는 초반에는 과연 선문답을 낭송집으로 만드는 게 가능할까라고 의구심과 한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두려움이나 혹은 전환할 줄 모르는 단단한 인식들이야말로 이 작업이 진짜 필요하다는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미 그렇게 무엇이 되고 안 되고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나는 가장 선답지 않은 방식으로 선을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업이 마무리를 보이는 이즈음엔 처음의 우려가 완전히 사라졌다. 오히려 선이야말로 진작부터 해설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입에 붙여 소리 내어 읽도록 시도되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모쪼록 이번 낭송Q시리즈를 계기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문답의 독특한 재미를 소리와 함께 온몸으로 만나게 되기를. 낭독(낭송)의 요령은 따로 없다. 본문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놓긴 했지만 선문답에 분류 기준이라는 게 애초에 있을 리 없다. 한편 낭독에서 중요한 건 자기 목소리를 자기 귀로 듣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 낯설고 또 때론 사람들이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온몸을 통과해 나오는 책 읽는 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바로 여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신체가 새로운 리듬을 만들게 되는 이런 행위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근본 취지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순전히 읽기 자체에 몰두할 수 있는 낭송용 텍스트로 선문답만 한 게 또 있겠는가. 역시 선문답이야말로 진정한 낭송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쓰다 보니 구구절절 말이 길어져 버렸다. 역시 선은 말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대면하는 것이 묘미다. 백문이 불여일독! 지금 바로 책을 펴고 읽어 보시라. 인문학 고전 쿵푸스들의 공동체 도량 남산강학원 공부방에서 문리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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