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시간 앞에 선 보행 이 책은 산을 보여주기 위한 사진집이 아니다. 산 앞에 서는 법을 알리고 싶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은, 산을 향해 걸어온 나의 시간과 태도가 축적된 결과물이다. 후지산, 일본 알프스, 몽블랑,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여러 산에서 촬영된 이 사진들은 서로 다른 지형과 문화권에 놓여 있지만, 하나의 질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사진 속에서 직접적인 답은 없다. 대신 오랜 걷기와 머뭄, 그리고 내려옴의 반복 속에서 조용히 누적된다. 사진들은 정상의 등정을 강조하지 않는다. 극적인 풍경이나 성취의 증거로서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산과 관계 맺는 과정에서 생겨난 미세한 감각의 흔적에 주목한다. 능선에 흐르는 침묵,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호흡, 날씨와 지형이 만들어내는 조건들.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사진의 배경이 아니라, 사진을 가능하게 한 전제들이다. 20여 년에 걸친 산행의 시간은 이 사진집의 보이지 않는 토대다. 일본 북알프스 종주를 시작으로 후지산, 몽블랑,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이르기까지, 나에게는 산은 단순한 이동의 공간이 아니라 윤리와 책임, 그리고 겸손을 학습하는 장소였다. 지리산등산학교 졸업, 대한산악연맹 활동, 응급처치 교육 등은 산을 감상의 대상이 아닌, 실제로 마주해야 할 현실로 인식해 왔다. 이것들은 나의 사진의 형식에도 반영되었다. 이 책의 이미지들은 화려하거나 과잉되지 않는다. 오히려 덜 말하고, 덜 주장하며, 오래 바라보도록 소망한다. 사진은 자연을 소유하거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 앞에서 내가 선택한 거리와 속도를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이 사진집은 ‘산악사진’이라는 장르적 범주를 넘어, 시간성과 지속성에 대한 사유로 확장하고 싶었다. 한 장의 사진은 단독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사진과 사진 사이에는 수많은 발걸음과 중단, 기다림과 판단의 시간이 흐르고 있고, 그 사이의 시간까지 함께 읽히기를 소망한다. 이 사진집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책은 산을 오르는 법이 아니라 산 앞에 서는 법에 대한 기록이다. 정상을 향한 욕망보다 귀환을 중시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존중하며, 자연을 소비의 대상이 아닌 관계의 상대로 바라보는 태도. 그 태도가 이미지로 남을 수 있는지를 조용히 묻고 싶었다. 사진은 결론이 아니다. 사진은 질문이 지나간 자리다. 이 책을 넘기는 독자 역시, 하나의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간을 통과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끝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산 앞에 서는 법을 다시 생각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2026 안나푸르나에서 최영희
리뷰 남기기
로그인하면 리뷰를 남길 수 있어요.
리뷰 0개
아직 리뷰가 없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