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개벽’이라는 말이 한국철학사에서 하나의 ‘사상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찍이 류병덕이 지적하였듯이, 1860년에 창시된 동학에서부터였다. 1860년은 동아시아사상사의 일대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해였다.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으로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군에 점령당했다. 그 해에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상징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가 서양을 배우러 미국으로 떠났다. 중화의 권위가 무너짐과 동시에 일본의 탈아(脫亞)가 시작된 것이다.그런데 이 해에 한국에서는 새로운 학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신학(新學), 즉 동학(東學)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이전의 구학(舊學)과는 차별화되었다. 종래의 학문들은 하나같이 중국에서 전래된 ‘수입학문’이었던 반면에, 동학은 한반도에서 자생적으로 탄생한 ‘국산학문’이었다. 한반도 자생의 학문(學文)이라는 점에서는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제창한 ‘풍류도’와 비슷하지만, 풍류도는 「난랑비서문」에 몇 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전부여서 ‘학’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동학은 나름의 체계를 갖춘 우주론과 존재론, 그리고 수양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초의 자생적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동학의 창조성은 독특한 우주론과 시대인식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개벽’이다. ‘개벽(開闢)’은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다”[天開地闢]는 뜻으로, 원래는 우주의 시작을 말하는 개념이었는데,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그것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우주 질서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재해석하였다. 즉 1860년은 마치 이 세상이 처음 열리는 태초의 상황처럼 옛 질서가 가고 새 질서가 작동하는 ‘다시 개벽’ 시대라는 것이다. 그 새 질서의 핵심을 최제우는 ‘시천주’라는 새로운 인간관으로 제시하였다. ‘시천주(侍天主)’란 “모든 인간은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자기 안에 하늘님[天主]을 모시고 있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을 신성하고 존엄한 존재로 ‘다시 규정(更定)’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러한 개벽적 인간관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었는데, 자기 집의 노비 두 명을, 한 명은 며느리로 다른 한 명은 수양딸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최제우가 천주(天主)와 인간을 개벽하였다면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천지(天地)와 만물을 개벽하였다. 최시형은 먼저 최제우의 ‘다시 개벽’에 『주역』의 선천과 후천 개념을 적용하여 ‘후천개벽’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후천개벽을 선천의 물질개벽에 대해서 ‘인심개벽’이 요청되는 시대라고 해석하였다. 최시형이 주창한 인심개벽은 다른 말로 바꾸면 정신개벽이나 도덕개벽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때의 ‘도덕’은 유학에서와 같은 삼강오륜이나 차등적 윤리 질서를 의미하는 도덕이 아니라, 일종의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도덕을 말한다. 즉 ‘생명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 평화의 실현’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로 인심개벽이자 도덕개벽인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동학의 ‘다시 개벽’은 도덕 개념의 재구축을 통한 도덕 강화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은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1953- ) 교수가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지적한 한국인의 ‘도덕지향성’과도 잘 부합되는 측면이다. 다만 오구라 기조 교수가 말하는 도덕이 여전히 주자학적인 틀 안에서의 윤리도덕을 가리킨다면, 동학의 도덕은 그런 틀을 해체시키기 위한 생명도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아울러 최시형에게서는 도덕의 대상이 인간을 넘어 천지(지구)와 만물로까지 확장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최시형의 ‘천지부모 만물동포(天地父母 萬物同胞)’ 사상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이기도 하다. 최시형은 전통적인 ‘혈연’ 관점이 아닌 ‘생명’의 관점에서 세계를 다시 보았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의 부모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만물을 생성하고 길러주는 ‘천지’ 역시 부모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점은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늘에서 내려주는 햇볕, 땅에서 제공하는 영양소, 바다에서 제공하는 물, 대지에서 뿜어나는 공기…. 이런 은혜들이 없다면 그 어떤 생물도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천지의 자식에 다름 아니고,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젖과 밥을 먹고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동포로 간주해야 한다. 최시형의 ‘경물(敬物)’ 사상은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도 천지의 자식으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최시형의 사상은, 최제우가 그러했듯이, 사상사에 있어서 하나의 ‘개벽’과도 같은 사건이다. 종래의 인간중심주의와 혈연중심주의에서 지구중심주의와 생태중심주의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가치의 축을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시형의 개벽사상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말해 경물(敬物)이 빠진 물질개벽으로 인해 인류는 지금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최시형은 현대 사회의 이러한 전개를 미리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890년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이 세상의 운수는 개벽의 운수다. 하늘과 땅이 불안하고 산천과 초목이 불안하고 강하의 물고기가 불안하고 산림의 짐승이 불안하다. 그런데 어찌 사람만 홀로 따뜻한 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편하게 도를 추구하겠는가! _최시형, 『해월신사법설』「개벽운수」현대인들은 인간의 불안은 말해도 천지의 불안은 말하지 않는다. 인류의 불안은 걱정해도 생물의 불안은 돌보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한국 사상가 해월 최시형은 천지와 생물의 불안을 염려하였다. 그리고 이 불안의 시대를 ‘개벽의 시대’라고 명명하였다. 해월의 염려는 그로부터 100여 년 뒤에 우리 앞에 현실로 드러났다. 기후 위기, 환경 파괴가 그것이다.20세기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된 산업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명과 평화의 관계에서 수단과 도구의 관계로 전환시켰다. 자연과 만물이 인간의 편리와 풍요를 위해 도구적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자연은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은혜로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복무하는 한낱 피식민지에 불과하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와 환경문제는 모두 이와 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폭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동학 연구자 표영삼은 “개벽은 삶의 틀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개벽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160년 전에 시창된 개벽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해월은 천지만물의 불안에 대한 처방으로 ‘시천지(侍天地) 경만물(敬萬物)’ 사상을 설파하였다. ‘천지를 부모처럼 섬기고 만물을 하늘처럼 공경하는’ 것이야말로 만물을 편안하게 하는 안물(安物)의 길이라는 것이다.1989년에 나온 「한살림선언문」, 2002년의 「지리산선언문」, 2010년의 「생명평화선언」, 2012년의 「지리산 생명평화 1천인 선언」 등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폭력과 지배에서 생명과 평화의 관계로 개벽하자는 외침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은 ‘개벽의 움직임’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 스웨덴의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유엔에서 보여준 ‘분노의 연설’은 그 상징적인 예이다.이 책은 국내외의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벽의 징후들’을 포착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오늘날 “하늘[天], 땅[地], 사람[人], 생활[生]”이 어떻게 개벽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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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말 5제1부 天 마음·종교·수양한살림 마음살림과 질문의 전환 _ 주요섭 15개벽의 시대, 종교의 미래를 생각하다 _ 유정길 23새로운 시대의 명상 수행 _ 김용휘 33퇴계의 성학십도, 가상현실[VR]과 만나다 _ 이원진 45동학, 천도교의 개벽 _ 심국보 66몸짓으로 풀어낸 ‘여성성’에 대한 고민,마음 개벽으로부터 문명 개벽까지 _ 송지용 74기독교와 개벽: 하늘신학을 향하여 _ 손원영 82제2부 地 생명·평화·환경적폐청산 積幣淸算 재조산하 在造山河) _ 고은광순 93개벽의 케리그마, 동아시아에서 유라시아로 울려 퍼지다 - 일본편 _ 김유익 101개벽의 케리그마, 동아시아에서 유라시아로 울려 퍼지다 - 중국편 _ 김유익 109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환경 보전형 농업을 주목하라 _ 전희식 117비정상적인 마케팅에서 정상적인 마케팅으로의 전환 _ 이무열 124시민운동의 전환, 시민이 주인되는 시민운동 _ 윤창원 132초대받지 않은 손님, 코로나 바이러스와 주역 수괘(需卦) _ 김재형 138전 지구적 생태 위기는 개벽적 전환을 알리는 메시지 _ 유정길 154제3부 人 정치·경제·사회개벽학파의 발견과 계승 _ 조성환 171회통과 상대를 인정하는 통일로의 전환 _ 윤창원 178마을에서 개벽을 실현하다 _ 유상용 184직접민주주의 민회와 새로운 정치 인류의 탄생 _ 임진철 194농민수당, 다시 농민을 천하의 근본으로 삼다 _ 박경철 201공유경제로 가는 다시개벽 _ 류하 209제4부 生 인간·문화·생활미디어 개벽의 징후 _ 김동민 219개벽마을이란 _ 강주영 227출판, 개벽의 징후의 기미 _ 박길수 244청년은 각자의 이름으로 온다 _ 성민교 256다시 마을로 가는 기초공동체 _ 황선진 262시민주권시대에 민주시민교육확산! _ 서원희 269이머시브 사운드, 실감 음향 _ 구종회 277개벽의 일꾼들과의 대화, 개벽포럼 _ 조성환 28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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