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서 문 미국 오레곤 일반적으로 Oregon은 '오리건'으로 표기하나, 한인 사회에서는 오레곤을 주로 사용하며, 한인회에서도 '오레곤 한인회'로 표기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여, 본서에서는 '오레곤'이라고 표기한다. 다만, 공식 명칭을 사용할 경우에는 '오리건'을 사용하며, 현지 대학교명 등 고유명사는 공식 표기인 '오리건'을 따른다. 주는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비교적 작은 주로, 한반도 전체보다 조금 넓은 면적에 인구는 430만 정도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온 캘리포니아, 뉴욕 등 유명한 주에 비하면 이름도 생소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이곳 오레곤에도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온 우리 한인들이 다수 있으며 그 인구는 현재 25,000명 내외로 추산된다. 역사적으로 오레곤 주는 태평양 연안 3개 주인 캘리포니아, 워싱턴, 오레곤 주 중에서 가장 발전이 더뎠다. 1900년대 중반까지도 오레곤은 농업과 임업이 주된 산업이라 일종의 서부 벽촌이라는 느낌이 많았다. 이곳 오레곤으로의 최초 한인 이민은 1911년 한인 노동자들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이주노동을 왔던 한인들의 일부가 오레곤으로 재이주하였다. 미국 본토가 하와이보다 임금이 더 낫고 일자리도 많으며 대우도 더 낫다는 사실이 주된 동기였다. 하와이 혹은 인근 다른 주에 살던 한인들이 하나둘 오레곤 그레셤(Gresham)이라는 소도시로 모여들면서 한인들은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 정도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도 오레곤에서 가장 큰 도시인 포틀랜드로부터 약간 떨어진 그레셤의 ‘포레스트론 공원묘지(Forest Lawn Memorial Park)’에서는 한국 이름의 묘비명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오레곤에 초기 이주한 한인들의 묘소이다. 초기 한인들은 채소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양파,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양배추 등이 주 재배 작물이었다. 정착 초기 동양인들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규정으로 인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집도 없는 가운데 오레곤으로 흘러들어와 농토를 일구어야 했던 초기 한인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움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허름한 주거 공간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해야 했지만 때로는 지주의 탐욕으로 인해 재배한 작물을 뺏기는 일도 생기곤 하였다. 다행히 1954년 법령 개정으로 한국인들이 농토를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면서 한국인들의 농업 경영은 더 활발해졌다. 이후 오레곤 한인들의 채소 농사는 미국 한인사회에도 많이 알려질 만큼 나름의 기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 시대 오레곤에 정착한 한인들도 나라 없는 민족으로서 많은 고난을 겪은 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비밀자금을 모아 보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이승만 박사를 직접 만나 교류하면서 자금을 전달한 사례도 있다. 이들이 보낸 독립자금은 해방 전까지 약 300만 불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태평양 전쟁 와중에는 일본인으로 몰려 곤욕을 겪기도 했으나 ‘미국과 함께 일본과 싸우는 한국인’이라는 뱃지를 만들어 달고는 큰 자긍심을 가지기도 했다. 1960년대 초의 기록에 따르면 한인 2세들은 1세대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던 것과 달리 엔지니어, 교사, 의사 등 다양한 전문직과 식당, 주유소, 미용실 등의 자영업을 운영하는 등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초기 정착 1세와 2세로 구성되었던 이민 사회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유학생들의 유입으로 조금씩 늘어나며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가족 초청 이민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면서 한인 이민자들의 유입은 크게 늘어났다. 『오레곤 한인회 50년사』에 따르면 1960년대 결성된 한인회 모임 때는 제대로 된 장소가 없어 인근 초등학교나 공공기관을 빌려야만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임에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나눠 먹고 나면 장소를 빌려준 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임 장소도 여러 차례 옮겨 다니면서 그야말로 집 없는 설움을 겪어야 하였다. 이후, 한인회 차원의 지속적인 한인회관 건립 모금 운동과 뜻있는 한인들의 기부가 잇따르며 마침내 학교 건물 하나를 회관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교민들은 “이제사 마음껏 떠들고 마음껏 한국 음식도 먹게 되었다” 하면서 기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초기 정착 시기 한인들의 노고와 희생은 매우 컸다. 비록 다른 주의 한인사회와 비교했을 때 큰 규모는 아니나, 오레곤의 한인사회도 나름의 한민족 정체성을 오롯이 지키면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오레곤 한인의 다수는 포틀랜드에 거주하고 있으며, 오리건 주립 대학교(Oregon State University)가 있는 코발리스(Corvallis)와 오리건대학교(University of Oregon)가 있는 유진(Eugene)에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교민이 수백 명 거주하고 있다. 이민 이후 한국 국적을 유지하는 교민들도 있으나, 다수는 현지 정착이 안정화되고 나면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유학을 통한 이민과 기술 전문직을 중심으로 한 이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번 구술생애사 연구는 한인이 다수 거주하는 캘리포니아나 뉴욕, 미시건, 조지아 주 등에서 벗어나 비교적 소수이지만 한인들의 미국 이주 역사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오레곤 주를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오레곤 주의 한인 이민 역사도 다른 주와 크게 다름없이 이민 1세대들의 엄청난 헌신으로 그 기반을 다졌고 2, 3세대의 지속적인 정착 노력을 통해 어엿한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한인 이민자들의 이민 역사를 개개인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미국 이민사 연구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한인 이민이 개인별로 다양한 배경과 동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만큼 이민사의 세세한 결들을 다시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본서의 구술생애사 연구는 총 7명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이민 2세대에 해당되는데 유학을 통해, 혹은 가족 초청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민 1세대가 고령으로 대부분 사망한 현실을 고려했을 때, 이민 2세대는 초기 이민 역사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본서는 이들을 통해 오레곤 한인 이민의 여러 이주 형태와 정착 역사를 소상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제1장 박덕기씨는 미국인과의 결혼을 통해 이주하였던 누님의 초청으로 전 가족이 이주한 사례다. 하지만 이주 후 얼마 되지 않아 가족들을 초청해 주었던 누님과 막내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말았다. 그 이후 그로서리 스토어 경영과 한국 식품회사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야만 했는데, 그 와중에 감기약을 잘못 팔아 미국법의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개인 이민사는 그 누구보다도 여러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는 일상에 감사하면서 즐겁고 유쾌한 삶을 살고 있다. 제2장 배수만씨는 초등학교 때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건너와서 살게 된 경우다. 그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까지 하면서 살아왔지만 미국인 친구는 거의 없이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어울려 지내온 사람이다. 대개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이민을 오면 미국 주류 사회로의 편입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러운데, 그는 누구보다도 뚜렷한 한국인 정체성을 갖고 있어 흥미로운 개인사를 전해주고 있다. 제3장 신윤식씨는 1960년대 초 미국 유학생으로 미국에 입국하여 초기 오레곤 한인회를 결성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농업으로 초기 정착한 오레곤 이민 1세대와의 결속력을 바탕으로 한인회관 마련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대학원 졸업 이후 미국 회사를 다니다가 한인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그로서리, 여행사, 기념품 가게 등 다양한 사업을 일구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한인 이민이 정착 과정에서 여러 사업 형태로 확장되어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4장 유철민씨는 청년기에 가족과 함께 미국하여 세탁업에 종사하면서 한인 세탁업협회 회장을 지냈고, 주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한인 세탁업자들의 권익 신장에도 기여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오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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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장 박덕기 1 ▮ 출생과 가족 배경 42 ▮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42 ▮ 가족의 생계와 중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 42 ▮ 군 복무와 방위 근무 42 ▮ 축구 코치로서의 활동과 한국에서의 마지막 직장생활 42 ▮ 미국 이민의 배경과 정착 과정 42 ▮ 미국에서의 사업경험 42 ▮ 결혼과 자녀 교육 42 ▮ 신앙과 지역 사회 활동 42 제2장 배수만 41 ▮ 유년기 가정환경과 브라질 이민 실패 42 ▮ 미국 이민 정착 초기 42 ▮ LA 생활과 교육 경험 42 ▮ 포틀랜드 이주와 가족의 분산 42 ▮ 다양했던 직장 생활 42 ▮ 결혼생활과 자녀교육 42 ▮ 포틀랜드의 한인사회 42 ▮ 성당 활동 42 ▮ 미국 사회에서의 민족정체성 42 제3장 신윤식 65 ▮ 유년 시절의 월남 과정과 남한에서의 정착 42 ▮ 6.25 전쟁 체험 42 ▮ 대학 생활과 유학준비 42 ▮ 유학생활 42 ▮ 결혼생활과 자녀교육 42 ▮ 직장생활과 개인 비즈니스 42 ▮ 한인회 활동과 한인회관 건립 42 제4장 유철민 105 ▮ 출생과 성장 42 ▮ 가족 배경 42 ▮ 한국에서의 청년기와 직업 경험 42 ▮ 미국 이민 초기 정착 과정과 결혼 42 ▮ 아내의 사고와 투병, 그리고 신앙 42 ▮ 세탁업 운영 42 ▮ 자녀 교육 42 ▮ 종교생활과 지역사회 활동 42 ▮ 인생에 대한 성찰과 감사 42 제5장 이시효 191 ▮ 유년기와 학창시절 42 ▮ 군 복무와 미국 유학 준비 42 ▮ 미국 이민과 전문의 과정 42 ▮ 미국 초기 정착 생활과 가족 초청 42 ▮ 결혼과 자녀 양육 42 ▮ 유학생 선교 활동과 신앙생활 42 ▮ 캘리포니아에서의 노후생활 42 제6장 임춘섭·임성수 부자 235 ▮ 임춘섭 236 ◯ 전출생과 청소년기 시절의 전쟁살이 236 ◯ 전후 서울 생활과 결혼 236 ◯ 미국 이민 과정 236 ◯ 미 정착 이후의 직업생활과 지역 사회 활동 236 ◯ 종교 생활과 신앙관 236 ◯ 독한인사회 활동과 정체성 인식 236 ◯ 이민자로서의 회고와 메시지 236 ▮ 임성수 236 ◯ 어린시절 236 ◯ 미국 이민 이후 직업생활 236 ◯ 결혼과 자녀양육 236 ◯ 부친 봉양 236 ◯ 종교생활 236 ◯ 민족정체성 236 제7장 하감호 235 ▮ 유년기와 가족 배경 42 ▮ 학창 시절과 교육 경험 42 ▮ 대학 생활과 사회 인식 42 ▮ 소년기 신앙 생활 42 ▮ 군대 경험과 신앙의 전환 42 ▮ 대학 졸업 후 취업과 직장 생활 42 ▮ 미국 유학과 초기 정착 42 ▮ 미국 내 공무원 직장 생활과 축구 심판 활동 42 ▮ 자녀 교육 42 ▮ 부부 결혼생활과 신앙생활 42 찾아보기 25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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