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머리말 1961년 12월 6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담화문 발표와 함께 출범한 한국의 ‘가족계획 사업’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지만, 역으로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 문제를 야기시켰다. 정부는 1996년 가족계획 사업의 종언을 공식 선언했고, 2003년 새롭게 출산장려 정책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되돌아보니 한국이 가족계획 사업을 중단한 시기는 너무 늦었다. 가임여성 1인당 출산율이 현상유지 수준에 다다른 해는 1983년. 역사에 가정이란 소용 없지만, 1983년 인구정책의 방향을 전환했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 문제에 대한 지금의 고민이 다소 가벼워졌을지 모를 일이다. ‘경제 민주화’란 용어로 압축되는 각종 개혁과제는 고령화, 저성장, 일자리가 감소한 시대상에 비쳐볼 때 더 이상 변화를 거부할 수 없는 정책에 관한 이야기다. 대기업으로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갑과 을의 부당한 관행 개선, 정부가 추진하는 비정상의 정상화가 모두 고성장 시기 정책과 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가족계획 사업’이 시행 22년 만에 정책 전환 모멘텀을 한 차례 놓쳤고 35년 만에 폐기되고 42년 만에 당초 취지와 180도 다른 방향으로 전환됐듯이 저성장 국면에서 경제 정책은 고성장 시대의 그것에 비해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처방이 아닌 근본적인 처방을 모색하기 위해 40~50년, 즉 반세기 전 제정돼 현재까지 남아있는 관행을 법 제도를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국가 전체의 자원이 절대 부족했던 반세기 전 국민의 복리를 위해 구성했던 법과 관행이 반세기 동안 유지되며 공공이 아닌 한 기업에 절대 이익을 보장하는 노다지가 됐다. 전환 시기를 놓친 정책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특히 과거 성공한 정책의 향수에 취한 사회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 가속 페달을 밟는 운전자와 다를 게 없다. 성장기에 필요한 영양소를 성숙기 어른에게 주입하면, 성장은 이뤄지지 않은 채 성인병에만 걸린다. 성장기와 성숙기의 정책은 달라야 한다. 아쉽게도 한국 사회는 정책 전환에 성공하지 못했다. 1960~1970년대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은 21세기가 되도록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멈추지 않은 채 가속 페달을 밟은 결과 한국사회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1960년대부터 21세기까지 국가의 성장을 ‘빨리빨리’ 이뤄야 한다는 단 한 가지 목표에 맞춰 편파적으로 특정 집단에 모든 자원을 투입한 결과 한국 사회는 처음에는 문화를, 다음에는 경제를, 이후에는 삶의 가치를, 급기야 생명을 위협하는 사회가 됐다. 처음에는 쌀을 먹던 사람들이 빵을 먹는 문화의 변화가 있었고, 다음에는 기업을 살리기 위한 가계 경제의 희생이 뒤따랐다. 이후에는 개인의 행복을 경제성장과 맞바꾸는 교환이 이뤄졌으며, 급기야 안전하지 못한 가습기 살균제가 판매돼 유아가 사망하는 비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노다지 주식회사는 수십년째 경제 성장만이 절체절명의 최우선 사회적 가치였던 1960~1970년대를 모면하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기업을 말한다. 과점 시장을 형성하고, 혁신을 무기로 진입하려는 새로운 기업들에게 진입 장벽을 치며, 이미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진 게임의 규칙을 고수하는 기업 집단이다. 노다지 주식회사가 점령한 노다지 생태계에서 개인들의 생존법은 침묵하고 순종하는 길 뿐이며, 아무도 잘못을 말하지 않는 사회는 이미 오래 전 활력을 잃어 버렸다. 과거의 향수를 좇는 노다지 주식회사는 사회 전체의 혁신 에너지를 훼손시킨다. 정부는 노다지 주식회사의 응석을 받아주다 ‘헬리콥터 정부’가 되어 버린 채 국민이 아닌 일부 기업의 기득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공익마저 져버리고 있다.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헝그리 정신’을 바탕으로 노다지 주식회사는 정부 뿐 아니라 국민까지 포획했다. 문화와 경제와 삶의 가치와 생명 이후 더 빼앗길 것은 무엇일까. 10년이 넘게 일한 정치·사회·경제부 기자가 본 것은 ‘노다지 주식회사의 만연’이다. 원조를 받던 국가로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인 반 세기 전 관세법은 여전히 제분회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그 동안 우리 땅에서 밀과 함께 농민도 사라졌다. 3년 동안 3800억원에 이르는 우리나라 여행객의 해외면세점 지출을 국내로 끌어 오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입국면세점 설치법은 명확한 이유도 없이 20년 동안 논의에서 배제됐다. 가계의 호주머니를 털어 산업계 전기료를 대신 내주는 체계는 1차 석유파동 직후인 1974년 도입된 뒤 40년 동안 유지됐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던 기업인은 모두 10년 고비를 넘기지 못한 채 스러졌고, 1950년대 4대 기업이 여전히 4대 기업으로 국가적 지원을 빨아들였다. ‘노다지 주식회사’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먼저 ‘노다지 주식회사’는 산업 생태계를 완전히 바꿀 때까지, 또는 바뀐 뒤에도 계속하여 매출을 올릴 기회를 탐색한다. 제분업계 매출이 늘어나는 동안 국내에서 밀이 멸종 위기에 처하고, 입국면세점이 대체 어떤 것을 뜻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전 세대가 관련 경험을 잃을 때까지 입국면세점 논란은 억제된다. 두 번째로 ‘노다지 주식회사’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들의 매출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요인은 ‘고객’과 ‘소비자’라기 보다 ‘제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착한 기업’ 열풍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데 인색하거나 정관계 로비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노다지’를 제공하는 이들이 모두 정관계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노다지 주식회사’는 역사가 길어질수록 각종 정책의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된다. 오랫동안 해당 산업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한 끝에 ‘대마불사’(too big too fail)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국내에서 재벌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 역시 보통 반세기 동안의 역사를 지닌 이들의 원초적 속성이 ‘노다지 주식회사’이기 때문이다. ‘노다지 주식회사’가 득세하는 생태계 속에서 사람들은 침묵하고 순응한다. 발언하고 저항하는 순간 낙인 찍히고 배제되기 때문이다. ‘노다지 주식회사’가 이룬 폐쇄적인 생태계 속에서는 기업가 정신과 혁신이 발 붙일 수 없다. 그리하여 처음에 노다지 주식회사 외부에 해를 끼치던 노다지 생태계는 결국 스스로를 향해 독을 내뿜는다. 패자부활이 허용되지 않고, 기존에 형성된 산업계의 파이를 추가로 나눌 참여자를 배제하는 세태는 실상 ‘노다지 주식회사’ 자체의 성장판을 닫아 버린다. 높은 출산율 때문에 가족계획사업의 가속 페달을 밟은 결과 맞은 저출산 사회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멈추고, 자성하고, 돌아서야 한다. 노다지 주식회사의 독주를 멈추고, 지금까지 노다지 생태계의 걸어온 길을 자성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찾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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