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성대석 사진전 만경강 -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이야기. 만경강은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율치의 밤샘에서 발원하여 황해의 새만금사업지구로 유입하는 국가하천이다. 만경강의 지명 만경(萬頃)은 조선시대 ‘백만이랑’의 의미로 넓은 들을 의미한다. 최근 만경강은 간척사업으로 역설적이게도 그 넓이는 넓어졌으나 만경평야의 ‘백만이랑’과 자연하천의 그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성대석은 5년 전(2012년)부터 만경강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과 연관된 개인적 관점에 기대어 만경강의 공간적 시점에서 바라본다. 그는 어릴 적 보낸 그러나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곳을 다시 찾아 잊혀져가던 가족의 기억들을 꺼냈다. 7형제를 나으셨던 어머니의 고향 ‘춘포’, 아버지가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던 ‘대장촌’을 중심으로 만경강의 발원지 ‘밤티마을’에서 서해와 만나는 ‘심포항’까지 개인사적 기억의 공간과 연관된 지역의 흔적들을 찾아 나섰다. 그는 주관적 관점에서 시작된 만경강의 공간을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 지금의 만경강이 변모하는 역사적 현장 그 모습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매우 감성적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만경강의 지워지는 만경강의 슬픔을 섬세하게 표출하고 있다. 성대석의 만경강사진의 지역성과 공간성은 엄밀하게 구별해야 한다. 만경강의 지역성은 구체적인 의미를 지시하는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공간성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만경강의 객관적 정보가 끊어진 지점에서 지각되는 일종의 분위기다. 그것은 한 개인의 기억과 연결되는 지점이고 주관적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형제들과 함께 고향을 다시 찾아가 마을을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여기에는 부모님과 두 명의 형제가 빠져있다)과 오래된 흑백사진들이 있는가하면, 난데없이 여관방에 걸려있는 서양식 돛단배 그림도 있다. 또 학교정원에 방치된 낡은 동상들, 간척 사업으로 농토가 매몰되고 그 위에 공사현장의 붉은 깃발들, 죽은 물고기, 위태롭게 버티고 서있는 오래된 교각기둥들, 버려진 어부의 배, 쓰레기로 덥혀가는 강어귀, 폐허로 쓰러진 열녀비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매우 상징적이다. 특히 넓은 만경평야에 갑자기 놀라 질주하는 노루와 개발로 허물어지고 있는 건축물과 공사현장의 깃발은 현재 만경강의 변모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마치 아득한 과거시간의 파편이 현재로 침투해 펼치는 파노라마 공간의 정지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성대석의 만경강은 쉽게 읽혀지는 그 흔한 개발현장의 객관적 보도 사진들과 다른 고도로 상징적이며, 상상력을 촉발하는 공간이다. 성대석의 만경강 사진의 지시대상은 지역성 그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진에 찍혀진 만경강의 것들은 매우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거기 놓인 이유와 원인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것이 바로 만경강의 특별하고 고유한 분위기를 또 작가의 개인적관점이 개입되는 공간성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우연히 발견한 플라스틱 곽을 찍고 엉뚱하게 ‘드림아파트(dream apart)’로 제목을 붙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상징적 공간으로 그 대상을 말하려하는 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를 야기 시킨다. 사진이미지가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이 관객의 상상력에 의지해야 하는데, 이때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야기의 방향을 어떤 관점과 시점에서 포착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성대석사진의 방법적 형식은 사진에 표제를 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붙이기도 하지만, 사진이미지 스스로가 텍스트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전시 디피방식에서 한 묶음으로 연결된 여러 장의 사진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은 마치 응축된 단어나 한 문장의 의미를 내포한 메타포로서 풍성한 말들을 엮어낸다. 물론 이것은 언어의 구조처럼 구체적 이야기를 지시하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세밀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사진의 배치효과로 이미지상상력을 배가시킨다. 폐허화된 집터는 과거를 불러들이고 공사장의 붉은 깃발은 닥쳐올 미래의 위험신호처럼 읽혀진다. 노루는 곧 사라질 위기를 알리는 현재의 신호다.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성대석은 만경강을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또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만경강을 찾은 이유는 전적으로 사적인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 고향을 등지고 떠난 자가 다시 찾은 그곳을 냉정하게 기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사진은 절대적으로 객관적 기록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 해서 주관적 관심의 대상들을 모두 만경강이 아니라고 매도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객관적 역사적 관점에서 만경강의 모습을 기록하려 한다면 과연 사진으로 이것이 가능할까? 또 사회적, 문화적 관점이라는 것이 과연 만경강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까?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들은 우리의 의식세계에서 만들어낸 현실로 그렇게 보도록 강요된 사실들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생각들은 사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사진은 생각들을 찍을 수 없다. 사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생각들이지만 이것은 사진 속에 없다. 그것은 외부에서 떠도는 유령들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우연히도 갑작스럽게 이미지에 달라붙어 잃어버린 시간의 무의지적 기억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여기서 성대석의 만경강은 구체적 정보의 지역성을 넘어서 관객의 추측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성으로의 확장을 불러온다. 이것이 바로 사진이미지가 가지는 의미의 무한 생성의 힘이다. 사진이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공간은 절대적으로 객관적 정보에 얽매이지 않는다. 덧에 걸린 새(외가리), 그물에 잡혀 물위에 떠오른 물고기, 아이들이 놀다가 잃어버렸을 지도 모를 축구공이 만경강과 무슨 상관인가? 성대석은 만경강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백화현상으로 죽은 고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만경평야에 나무를 다시 세웠다. 일종의 자신의 퍼포먼스(performance)를 사진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이리저리 떠돌다가 하얀 몸뚱아리를 한 채, 바다가 메워진 곳의 빨간 ‘함초’위에 누워있는 죽은 나무를” 자신과 참 많이 닮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대석은 사진 이미지가 지시하는 언어적 한계를 초월하려한다. 50대 중반의 삶의 여정 속에서 결코 다 말 못하는 수많은 사연들을 어찌 한 장의 사진으로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사진이미지의 한계 보다는 어쩌면 말의 한계다. 만약 성대석이 명쾌하게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조각난 외마디 말들처럼 사진들은 파편적으로 이어 붙어서 사연이 붙기를 기다린다. 자 이제 관객은 성대석이 시선이 만들어 놓은 방향의 길을 따라 자의적으로 상상하면 된다. 그것은 관객이 사진 속 대상을 바라보지만, 결코 만경강의 객관적 관점의 덧에 걸리지 않는 각자 내면에 시선을 던지는 ‘말로는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의 이미지가 지시하는 이야기들이다. 글: 이영욱(사진이미지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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