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의 저자 말로니(G. A. Maloney)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영성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의 영성을 소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4 세기에 시리아와 이집트의 사막에서 “하나님에 취해 살았던” 수도자들의 영성을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류(源流)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사막 수도자들의 영성에 기초한 초기교부들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분열 이전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신앙의 규범이었다. 그는 동방교회의 관상(theroria) 전통을 마음의 기도로 요약한다. 관상이란 정신(mind) 혹은 지성(nous)이 마음으로 들어가 인격의 다른 요소들인 감정 의지등과 통합되면서 마음의 신비를 바라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상 전통의 근원은 플라톤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의 장소를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서 찾는 성서의 영성이다. 유대교는 우상숭배금지와 안식일 계명이 암시하듯이 하나님의 현존을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서 찾는다. 유대교 영성사상가 헤셀(A. J. Heschel)은 이러한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사람은 시간의 차원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유대교 영성이 하나님 임재의 장소로 제시하는 시간은 통속적인 의미의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말하는 ‘영원’과 유사하다. 유대교 영성은 시간이 끊임없이 흐르다 소멸한다는 통속적인 시간 이해를 인간이 공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교 전통 또한 크로노스(χρόνος)로 불리는 ‘시간의 흐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본래적인 의미의 시간을 - 희랍어로 신적이며 충만한 시간을 뜻하는 -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시간의 본질을 영원으로 부른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영원한 지금(Eternal Now) 혹은 지금의 순간이 하나님이 오시는 성소(聖所)라는 것이다. 현대의 영성신학자 나우엔(H. Nouwen)도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 순간에 계신다.” 그러나 동방교회의 영성전통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행자가 현재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 드러나는 것이 마음의 신비임을 강조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을 계시하시는 마음의 신비를 바라보기 위해선 현재의 순간에 머무르려는 훈련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5 세기의 사막 수도자 아르세니우스(Arsenius)는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사막 수도자들의 여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떠나라, 침묵하라, 고요하라.” 고요함을 뜻하는 헤시키아(ησυχια)는 동방교회 영성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헤시키아란 온갖 유혹들, 즉 악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 말이다.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와서 수종드니라”(마4:11) 교부들은 이러한 고요함 속에 빛이 비쳐지면 고요함(hesychia) 그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dabar)으로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즉 고요함 속에 머물렀던 시간이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동시에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자각하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교부들은 통회의 눈물과 내면의 빛을 참된 고요함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막교부들은 고요함에 이르기 위해선 세상을 떠나 침묵을 지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라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세상에 사로잡혀 분산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지금의 순간으로 거두어들이라는 권면이요, 이를 위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이다. 교부들은 이러한 수행(Praxis)이 기도에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6-399)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 안에 상처와 분노를 쌓아두고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없이 구멍 난 통에 물을 가져다가 붓는 사람들과 같다.” 교부들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침묵을 권면한다. 그러나 침묵하라는 것은 수행자들이 마음 속 신비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악한 영의 유혹과 싸우라는 것을 뜻한다. 악한 영과 투쟁하면서 마음을 정화시키지 않으면 마음 속 신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러한 맥락에서 악한 영의 유혹을 알아차릴 때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쳤으며, 이러한 영적 투쟁의 과정 속에서 등장한 예수기도가 동방교회의 전형적인 관상기도가 되었다. 물론 동방교회에는 마음의 영성뿐 아니라 지성적 관상 전통도 존재한다. 에바그리우스는 플라톤 철학을 신앙의 동반자로 간주하면서 지성적 관상 전통, 즉 지성의 정화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려는 관상 전통을 대변한다. 그러나 교부들은 니케아 공의회(325년) 전후로 플라톤주의와 구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더 깊이 인식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플라톤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지성을 인간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지성적 관상 전통도 마음의 기도에 권좌를 내주었다. 이를 통해 동방교회의 영성은 유대교 영성을 받아들이며 마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강조하는 - 사막의 안토니우스(Antonius)로부터 시작해 위(僞) 마카리우스(Pseudo-Macarius)에서 절정을 맞이한 - 안디옥 학파의 영성이 주도적이 되었다. 물론 에바그리우스의 지성적 관상 전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오히려 카시아누스(Johannes Cassianus)가 소개해준 지성적 관상이 주류로 자리매김했다. 동방교회에서 마음의 기도는 예수기도와 동일시되곤 한다. 마음의 신비를 바라보는 과정이 주로 예수기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로니는 예수기도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예수기도의 역사와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예수기도가 서방교회의 지성적 영성전통의 의미와 한계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예수기도는 ‘독서 묵상 기도 관상’의 단계를 밟아나가는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한 형태이다.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이 교파의 차이를 넘어서서 기도 그 자체로 간주해 온 렉시오 디비나 말이다. 따라서 가장 오래 된 형태의 렉시오 디비나라 할 수 있는 예수기도는 의심의 여지없이 서방교회의 영성전통을 되돌아보고 쇄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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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서론1. 헤시카즘2. 침묵의 고독 속으로 떠남3. 마음으로 기도하기4. 생명에 이르는 깨어짐 5. 영적 전투6. 예수기도7. 즉각적인 니르바나와 어둠의 사막8. 변형시키는 빛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서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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